다산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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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초당
한자명칭 茶山草堂
문화재지정사항 사적 제107호(1963년 01월 21일 지정)
보유문화재 정석(丁石)·약천(藥泉)·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다조(茶竈)
건립시기 조선후기
관리자 문화재관리국
유형 주택(한옥)
소재지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위도 34.578880
경도 126.746931
중심기사 정창섭-정약용과 저술
중심기사2 정약용


정의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주택. 1958년 지역민으로 구성된 다산유적보존회가 무너진 초당을 복건하여 이 해 사적 제107호(정다산유적 丁茶山遺蹟)로 지정받았다. 1970년, 1971년, 1975년에 보수공사를 하였으며, ‘茶山艸堂’이라는 현판은 김정희(金正喜)의 글씨로 유명하다.

내용

조선 후기의 대표적 사상가인 정약용(丁若鏞)이 1801년(순조 1) 신유사옥에 연루되어 강진으로 귀양와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중, 1808년에 윤규로(尹奎魯)의 산정이던 이 초당으로 처소를 옮겨 1818년 귀양에서 풀릴 때까지 10여 년간 생활하면서, 《목민심서》 등을 저술하고 실학을 집대성함으로써 실학사상의 산실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1]
다산초당은 추사 김정희의 현판으로 유명한 보정산방(동암)과 제자들이 머물렀던 서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경내에는 다산사경이라 불리는 정석(丁石)·약천(藥泉)·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다조(茶竈) 등 다산의 유적이 보존되어 있다.

시각자료

가상현실

이미지













지도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다산초당 정창섭-정약용과 저술 A는 B의 배경이다
정약용 다산초당 A는 B에 거주하였다 1808년-1818년
다산초당 강진 다산초당~백련사 간 숲길 A는 B와 인접해 있다
다산초당 백련사 A는 B와 관련이 있다
다산초당 다산유적보존회 A는 B와 관련이 있다 1958년
다산초당 김정희 A는 B와 관련이 있다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808년-1818년 정약용이 다산초당에 거주하였다
1958년 다산유적보존회가 다산초당을 복원하였다.

공간정보

위도 경도 내용
34.578880 126.746931 다산초당은 정약용이 거주지였다

참고문헌

주석

  1. "다산초당",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확인: 2017년 04월 23일.
  2. 민족기록화팀 촬영(2017년 4월 26일)
  3. 민족기록화팀 촬영(2017년 4월 26일)
  4. 민족기록화팀 촬영(2017년 4월 26일)
  5. 민족기록화팀 촬영(2017년 4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