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성일기 (해독)
DHLab
본 기사는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서 2016년에 개최한 특별전 '한글, 소통과 배려의 문자(2016.6.29~12.31)'의 도록 및 2016~2017년에 진행한 금요강독회 중 산성일기 (해독) 관련 '발표내용'을 참고 활용하여 작성되었습니다. 원문 중 옛 한글의 경우 웹브라우저 및 시스템의 문자세트(character set) 표현상 한계로 인해 표시가 불완전할 수 있으며, 각 내용상의 사소한 교정은 별도의 언급 없이 적용하였습니다. |
원문과 해석문(페이지 01)
원문 | 해석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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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셩일긔 병 만력십칠년긔츅구월의노라치란오랑로뇽호쟝군을이다
노라치녀진국오랑니졔한아비와아비다다오랑난의죽고노라치동방으로라니 븍녁모든오랑침노야긔세졈〃즁고 잇다감노략한인을도로보여즁도의헌튱더니다 오랑근오십등이싀합호노략고지휘뉴부죽이고건로라거 노라치즉시근오십의머리버혀듕됴의드리고 조흔말을공고졔한아비와아비듕국을위야병화의죽은곡졀&을알외여 쟝일홈을어드니라 |
산성일기, 병자년 명나라는 1598년 9월에 만주족 누루하치에게 용호장군의 칭호를 내려주었다.
누루하치는 여진의 오랑캐인데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아태의 난에 죽자 동쪽으로 달아났다. 이후 북방의 모든 오랑캐들을 침략하여(통합하여?) 그 기세가 점점 강성해졌으며, 때때로 사로잡은 명나라 사람들을 돌려보내서 명나라 황실에 충성심을 증명하였다. 하부의 오랑캐 극오십이 시하보 지역에 침략하여 지휘사 유부를 죽인 후 길림성 지역으로 달아나자, 누루하치가 즉시 극오십의 머리를 베어 명나라에 바쳤고, 또한 좋은 말을 진상하면서 자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아태의 난 때 명나라를 위하여 죽게 된 사연을 (황제에게) 아뢰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누루하치는 건주위도독첨사라는 벼슬과 함께 용호장군의 칭호를 얻게 되었다. |
원문과 해석문(페이지 74-76)
원문 | 해석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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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일의일이무광다 샹이세로더브러쳥의닙으시고셔문으로조나가실 셩의가득사이통곡여보오니셩즁의곡셩이하의못더라 한이삼밧남녁구층단을무으고단우희쟝막을치고황양산을밧고단우희뇽문셕을고 뇽문셕우희금슈교룡뇨펴고그우희누른비단일을놉히치고, 황양산셰흘세우고졍병수만을킈크고건쟝기맛치니로각각금슈갑옷다벌식닙고호위엿더라 한이황금샹샹의거러안야흐로활을타며졔쟝을활여뵈더니활기고뎐하로여금거러드러가시게니 보거러드러가샤삼공뉵경으로더브러졍즌흙우희셔례실 군신이돗기쳥온샹왈황뎨압셔엇지존리오인여세번졀고아홉번머리좃녜시니 인도야셤의오샤셔향야졔왕우희안시게고한이남향야쥬찬을셜고군악을움이더라 한이뎐하긔돈피옷두벌을드리고대신뉵경승지벌식주니 샹이벌을닙으시고셔삼샤례시니대신이례로샤례더라 이날져녁의뎐셔울드러오실닌평대군과대군부인과숙의다뫼셔드러오고 동궁과빈궁과봉님대군과대군부인을다쟝심양으로드러가실인야진즁의머무고 젹쟝이명길의가속을여주니명길이고두샤례더라 | 1637년 1월 30일 햇빛에 광채가 없었다. 인조가 세자와 함께 (죄인의 심정으로) 푸른 옷을 입고 남한산성 서문으로 나갈 때 성을 가득 매운 백성들이 통곡하며 임금을 보내는데 성 안 백성들의 울음소리가 하늘에 사무치더라. 청태종은 삼밭의 남쪽에 9층으로 된 단을 쌓고, 그 단 위에 장막을 친 다음 황금빛 양산을 받히고 용무늬 돗자리를 깔았으며, 용무늬 돗자리 위에는 길짐승과 날짐승 그리고 교룡이 그려진 요를 편 다음 황금색 비단으로 만든 차일을 높이 쳤다. 그리고 뜰에는 황금색 양산 세 개를 세운 다음 정예로운 병사 수만 명 중에 키가 크고 건장하기가 망치와 같은 자들을 뽑아 비단갑옷 다섯 벌씩을 껴입히고 호위하게 하였다. 청태종이 황금빛 평상 위에 걸터앉아 한참을 활시위를 타며 많은 장수들에게 활쏘기를 보여주고 있다가멈추고 인조대왕에게 걸어서 들어가게 하였다. 인조대왕이 백 보 넘게 걸어서 들어가시어 세 명의 정승, 여섯 명의 판서들과 함께 뜰 안 진흙 위에서 배례하실 때 여러 신하들이 돗자리 깔기를 청하였는데, 인조대왕은 황제 앞에서 어떻게 내 스스로를 높이겠는가라고 말하면서 세 번 절을 하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두드리는 예를 행하였다. 청태종이 인조대왕을 돌계단 위로 안내하여 오르게 한 후 서쪽을 향하여 여러 왕들 위에 앉게 하고, 자신은 남쪽을 향하여 앉은 후 술과 음식을 배설하고 음악을 연주하게 하였다. 청태종이 인조대왕께 담비가죽옷 두 벌을 드리고 삼정승과 육판서 및 승지들에게도 각각 한 벌씩 주자, 인조대왕이 그 중 한 벌을 입으시고 뜰에서 세 번 절하여 감사함을 표하시니 대신들 역시 차례로 감사함을 표하였다. 이날 저녁 인조대왕은 인평대군 부부와 숙의 등을 모두 데리고 한양으로 들어왔다. 소현세자 부부와 봉림대군 부부들이 모두 심양으로 들어가게 되어 진중에 머무르고 있었고, 청나라 장수가 최명길의 가속들을 보내주자 최명길이 매우 고마워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