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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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조선 중기의 문신. [내용] 본관은 창녕(昌寧). 직제학 사재(思齋)의 6대손이며, 아버지는 흔(忻)이다. 음서로 진주판관에 임용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아래에서 군무를 맡아 성을 고쳐 쌓고 무기를 수선하는 데 앞장섰다. 한편 격문을 돌려 충의지사를 부름으로서 군세를 늘리고 싸움에 대비하였다

1592년 10월 제1차 진주성싸움에서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과 함께 3,800여 명의 병력으로 2만여 명의 왜군과 싸워 승리했으나, 이듬해 6월에 벌어진 제2차 진주성싸움에서 3만 7000여 명의 왜군을 맞아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경상우병사 최경회(崔慶會), 충청병사 황진(黃進), 진주목사 서예원(徐禮元) 등이 이끄는 3,400명의 병력과 함께 싸우다가 순국하였다.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진주의 충렬사(忠烈祠)와 창녕의 물계서원(勿溪書院)에 배향되었다. [1]

민족기록화와의 연관성

임진왜란때 1차 진주성 싸움과 2차 진주성 싸움에 참전하였고 2차 진주성싸움에서 순국하였다.


노드 및 관계 테이블

노드 관계 노드
성수경 ~에 참전하였다 진주성싸움


참고

  1. 네이버지식백과, '성수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