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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15일 (목) 12:22 기준 최신판

탑비 용인 서봉사지 현오국사탑비
한자 龍仁 瑞鳳寺址玄 悟國師塔碑文
승려 종린(宗璘)
찬자 이지명(李知命)
서자 유공권(柳公權)



번역문

  • 출처: 이지관,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고려사4, 가산문고, 1997.[1]


증시현오국사비명(贈諡玄悟國師碑銘) [제액(題額)]

고려국(高麗國) 대화엄(大華嚴) 부석사(浮石寺) 주지(住持) 증시현오국사(贈諡玄悟國師) 비명(碑銘)과 아울러 서문(序文) 조산대부(朝散大夫)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한림학사(翰林學士) 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 지제고(知制誥) 겸(兼) 태자빈객(太子賓客)에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은 신(臣) 이지명(李知命)이 왕명(王命)을 받들어 비문을 짓고, 입내시(入內侍) 문림랑(文林郞) 장작소감(將作少監) 국학직강(國學直講) 충사관수찬관(充史館修撰官) 겸(兼) 태자중윤(太子中允)에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은 신(臣) 유공권(柳公權)은 조칙(詔勅)에 의하여 비문을 썼다.

대개 듣건대 부처님의 도(道)를 성취하기 어려움에 대하여 말한다면 이를 듣는 사람들이 현해상(懸解想)을 일으켜 비수(悲愁)에 빠질 수가 있다. 누구나 그를 배우기를 시작하면 골육(骨肉)을 던져 버리고, 깊은 산중(山中)에 들어가 삼베 옷을 입고, 스스로 신(身)·구(口)·의(意)를 금계(禁戒)하지 아니함이 없다. 쓴 것을 먹으며, 매운 것을 머금고 정미롭게 (결락) 닦아 모두가 (결락) 아니다. 대개 사람들의 상정(常情)은 일락(逸樂)을 좋아하고, 신근(辛勤)을 싫어함이어늘, 어찌 하물며 왕가(王家)의 자제(子弟)로서 부귀한 신분(身分)으로 태어나 기욕(嗜欲)과 완호(玩好)들이 날마다 목전에 진열되어 그에 빠지고 유혹되어 죽음에 이르러서도 깨닫지 못하고, 도도히 생사의 물결을 따라 흘러감에 있어서이랴! 이러한 것은 모두 (결락) 수(誰) (결락) 백무(百無). 어찌 가히 탄식하지 아니하겠는가? 오직 우리 국사 스님께서 이와 같은 비당(粃糖)과 추환(芻豢)을 불쌍히 여겨 부귀와 벼슬을 콧물과 침처럼 천시(賤視)하여 마치 헌신을 버리듯 영원히 돌아보지 아니하고, 번거로움을 싫어하고 고요한 곳을 좋아하며, 선행(善行)을 좋아하고 싫어함이 없었다. 선천적(先天的)으로 타고난 품성(稟性)으로써 위(謂) (결락) 물 위에 뜬 거품과 같아서 환신(幻身)이 실로 제불(諸佛)의 법신(法身)임을 알지 못하고 있다. 부처님께서 진성(眞性) 중에서 설법(說法)하시어 화엄(華嚴)의 색(色)과 공(空)이 민멸(泯滅)함과 이(理)와 사(事)를 함께 밝혔다. 거울을 갈아 광명(光明)이 드러남에 있어 그 광명이 거울 속으로부터 나오며, 모형(模型)을 태우고 불상(佛像)이 나타나는데, 그 불상이 모형 밖에서 드러난 것이 아니다. (결락) 일(一) (결락) 진실로 정각(正覺)을 구함에는 동교(同敎)의 교리만한 것이 없다. 이에 귀의하는 마음으로 복응(服膺)하되, 처음부터 끝까지 게을리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희유(希有)하다고 말하지 않겠는가!

스님의 휘는 종린(宗璘)이요, 자는 중지(重之)며 속성은 왕씨(王氏)이다. 대방광(帶方公) (결락) 주(主) (결락) 불(不) (결락) 기우(器宇)가 굉심(宏深)하여 다른 아이들과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항상 부도(浮圖)와 불상을 볼 때마다 문득 불면(佛面)을 쳐다보고 공손히 예경(禮敬)하였으며, 심지어 음식에 조금이라도 누린내와 비린 냄새가 풍기면 두드러기가 온 몸에 나타났다. (결락) 진망(塵網)에 얽매인 바가 되지 않았음을 (결락) 여기에서 가히 엿볼 수 있겠다. 나이 겨우 13살 때, 교(敎) (결락) 원(院)에서 간청하여 득도(得度)하고 법문(法門)이 되었다. 인묘(仁廟)께서 일찍부터 대각(大覺)의 여풍(餘風)을 계승 발전시킬 사람이 없을까 염려하다가, 이 때에 이르러 기꺼이 원명(圓明)국사(國師)에게 명하여 (결락) 시시(示時). 인자일(因自日) (결락) 희문자(喜文字). 15살 때, 불일사(佛日寺)에 나아가서 비구계(比丘戒)를 받았으니, 신유년(辛酉年) 12월이었다.

인묘(仁廟)께서 항상 궁내(宮內)의 도량에 국사를 청하여 강론하였는데, 청중이 날마다 경청하고 조금도 게을리하는 이가 없었다. 황통(皇統)(결락) 의종(毅宗) 원년(元年) 병인(丙寅)에 비서(批書)를 내려 수좌(首座)로 진급(進級)하였다. 그 후 귀신(歸信)·국태(國泰)·중흥(重興)·부석등사(浮石等寺)를 차례로 주지(住持)하였다. 그러나 방장실(方丈室)은 소연(蕭然)하게 텅비어 십전(十錢) 값어치의 저축물도 없었다.항상 안여(晏如)하여 울창한 종실(宗室)이 되어 궤(軌) (결락) 스님께서는 일찍부터 도덕을 쌓아 일대(一代)에 걸쳐 사부대중(四部大衆)의 아망(雅望)의 대상이었으므로, 이에 배명(拜命)하여 승통(僧統)으로 추대하였다. 황통(皇統) 7년 정묘(丁卯) 2월에 대내(大內)로 영입(迎入)하여 드디어 스님에게 명(命)하여 손수 대제(大弟)의 머리를 깎아주도록 하였으니, 예의(禮儀)의 극성(克盛)스러움이 자고(自古)로 비길 데가 없었다. (결락) 스님으로써 주관하도록 하였다. 경인년(庚寅年)에 이르러 지금의 명종 임금께서 즉위하여 다시 좌세(佐世)란 호를 첨가하였다. 신묘년(辛卯年) 가을에 내전(內殿)으로 초빙하여 만수가사(滿繡袈裟) 한 바탕을 하사하였다. 그 해 겨울에 이르러 백고좌회(百高座會)를 열고, 스님으로 하여금 (결락) 월(月)에 조금 몸이 불편하므로 문인(門人)이 의사를 청하니, 스님께서 이르되 (결락) 지(之) (결락) 의(矣) (결락) 미(未) (결락) 의사를 부르지 못하게 하였다.

6월 29일 병이 매우 심하여지므로 스님은 손으로 일몰처(日沒處)를 가리키면서 숙연히 입적(入寂)하였다. 안색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으며, 수족(手足)의 굴신(屈伸)도 생전(生前)과 같았다. (결락) 개경(開京) 동남쪽 귀법사(歸法寺)에 유해(遺骸)를 임시 안장(安葬)하였다. 임금께서 부음(訃音)을 들으시고, 크게 진도(震悼)하여 3일 동안 철조(輟朝)하고 근신(近臣)으로 하여금 장사와 49재를 지내도록 하였다. 7월 16일 전중소감(殿中少監) 임충질(任忠質)과 상서호부원외랑(尙書戶部員外郞) 최광유(崔光裕)와 내시(內侍) 함경전녹사(含慶殿錄事) (결락) 등을 보내어 (결락) 국사로 책봉하되, 시호를 현오(玄悟)라고 추증(追贈)하였다. 그리고 이 달 17일 동림산(東林山) 기슭에서 다비(茶毗)하고, 이 해 11월에 장단현(長湍縣) 대탁산(大倬山)에 안조(安厝)하였다. 장사하는 날에 하늘로 뻗은 오색(五色) 기운이 무지개와 같아서 영구차를 따라 갔으니, 보는 사람들이 모두 그 비상함을 경탄(驚歎)하였다. 자(自) (결락) 골(骨). 개(皆) (결락) 춘추는 53세이요, 법랍은 39였다.

스님은 천성(天性)이 겸근(謙謹)하여 검소와 절약으로 몸을 단속하고, 생활에 풍요로움을 구하지 아니하였으며, 기껍거나 불쾌함을 얼굴 표정에 나타내지 아니하였으며, 선행(善行)을 좋아하고 권세에 아부하지 않았다. 비록 지극히 시양(厮養)한 사람이라도 후덕하게 상대하지 않음이 없었다. 신(臣)이 일찍이 문지부(聞之傅) (결락) 부귀는 사람들이 구하고자 하는 바이나, 도덕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면 취할 것이 아니다. 또 이르기를, "불의(不義)하게 얻는 부귀는 나에게 있어 마치 부운(浮雲)과 같다" 라고 하였다. 스님은 도덕의 아망(雅望)에 따라 높이 승통(僧統)에 추대되었으니, 이는 도덕으로써 귀(貴)하게 여겨진 것이다. 항상 검약(儉約)하여 가득히 채워 풍족하기를 구하지 아니하였은 즉 불의의 부(富)를 부끄럽게 여긴 것이다. 존귀(尊貴)한 위치에서 스스로 하천(下賤)하게 처신함은 공손하고 예의가 있기 때문이니, 어찌 옛 사람이 말하는 독행군자(篤行君子)가 아니겠는가? 또 지인(至人)이 천지의 일기(一氣)에 유희(遊戱)하여 살아 있는 것을 마치 붙어 있는 군더더기와 매달려 있는 혹으로 여기며, 또한 죽음으로써 혹을 자르고 등창을 도려내는 것으로 여겼으니,비록 변화하여 닭이 되고 매미가 되며, 서간(鼠肝)도 되고 충비(蟲臂)도 되니, 또한 무엇을 그리워할 것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스님께서는 질병에 대하여 사(死)와 생(生)을 보되, 동일체(同一體)로 여겨 기도하지도 아니하고, 치료하지도 아니하여 (결락) 조용히 입적 (결락) 하였으니, 곧 스님의 마음가짐이 일반인들의 마음가짐보다 특이함을 알 수 있다. 문인(門人)들이 행장(行狀)을 갖추어 임금께 건의하기를, "우리 스님의 유골(遺骨)이 이미 음택(陰宅)에 나아갔으니, 하조(下詔)하시어 행적비를 세울 수 있도록 감히 성청(誠請)하옵니다" 라 하였다. 그리하여 임금께서 신(臣) 지명(知命)에게 명하여 비명(碑銘)을 지으라 하였으나, 신(臣)은 별다른 재주가 없고, 대강 문자를 조금 알 뿐이어서 굳이 (결락) 사양하였으나, 마지 못하여 문인(門人)이 기록한 행장(行狀)에 의거하여 억지로 서술하고 명(銘)하여 이르되,

시방세계(十方世界) 화장찰해(華藏刹海) 어느 곳이든 진진찰찰(塵塵刹刹) 미진국토(微塵國土) 두루 다하여 자재하게 유희하신 스님의 경지(境地) 넓고 넓은 바다 속의 비늘과 같네! ① 열반세계 가고옴이 둘이 아니고 터득하신 진여세계(眞如世界) 무하유(無何有)일새. 이름없고 모양없는 공(空)같은 마음 두두물물(頭頭物物) 삼라만상 몸아님 없네! ② 휘황찬란 그 광명(光明)은 수월(水月)과 같고 아름다운그 향기는 춘화(春花)와 같네. 괴겁(壞劫) 때가 이르러서 겁풍(劫風)이 부니 귀중하던 그 신체(身體)는 간 곳이 없네! ③ 무명(無名)구름 사라진 후 맑은 하늘에 마음달이 온 세계(世界)를 비추는구나! 스님께선 삼한국(三韓國)을 보호하시어 전쟁바람 사라지고 태평(太平)이 되다. ④ 어찌하여 딴곳으로 가시렵니까? 자비구름 널리 덮어 감로(甘露)를 뿌려 행원(行願)따라 교화(敎化)함이 신(神)과 같을새. 빙(氷)설(雪)에다 글 새기듯 힘을 다하다. ⑤ 위대하신 스님 행적(行跡) 간략히 적어 천만년(千萬年)이 지나도록 길이 전하여 지날수록 더욱 더욱 새로워지다. ⑥ 대정(大定) 25년 을사(乙巳) 2월 일에 문인(門人) 등이 왕명을 받들어 서봉사에 비를 세우고 흥왕사(興王寺) 대사(大師) 민구(敏求)는 글자를 새기다.

판독문

  • 출처: 허흥식, 『한국금석전문』중세하편, 아세아문화사, 1984. [2]

	 	
	 	
 	贈諡玄悟國師碑銘(題額)」

高麗國大華嚴浮石寺住持贈諡玄悟國師碑銘幷序」
      朝散大夫左散騎常侍翰林學士寶文閣學士知 制誥兼 太子賓
      客 賜紫金魚袋臣李 知命▨ ▨▨」
      入內侍文林郎將作少監國學直講充史館修撰官兼 太子中允
      賜紫金魚袋臣柳 公權▨ ▨▨」
盖聞 佛之道難成言之使人悲酸愁苦其始學也弃絶骨宍入山林衣麻布自身口意莫不有禁戒茹苦含辛精修▨▨▨▨▨▨▨▨▨▨▨▨▨」
皆非▨蓋人情好逸樂而惡辛勤也何况王▨子弟生於富貴嗜欲玩好日陳於前而沉迷荒惑至死不悟滔滔皆是迺▨▨
▨▨▨▨▨▨▨▨▨▨」
誰▨▨百無 焉可不嘆哉唯 我國師憫此粃糖芻拳涕唾爵祿脫屣不顧厭煩求寂樂善無猒出於天性以謂
▨▨▨▨▨▨▨▨▨▨▨▨▨」
▨浮漚不知幻身實因 諸佛▨於是性乃說 華嚴色空泯寄理事▨明磨鏡露光光由中出焦模見像像匪外▨▨▨▨▨▨▨▨▨▨▨▨▨▨」
一▨▨▨誠求正覺莫如 同敎乃歸心服膺終始不怠可不謂希有者乎 師諱宗璘字重之俗姓王氏帶方公▨▨▨▨▨▨▨▨▨▨▨▨▨主」
▨▨不▨▨▨器宇宏深與群兒異焉每見浮圖繪像輙▨于仰面而禮敬至於飮食少有薰腥氣則風疹遍身▨▨▨▨▨▨▨▨▨▨▨爲塵網所」
▨▨於斯可見矣年甫十三敎▨院▨請度爲沙門 仁廟甞恐 大覺餘風無人得嗣及是欣然 命圓明感▨▨▨▨▨▨▨▨▨▨▨示時因自」
日▨喜文字年當十五就佛日寺受戒乃辛酉十二月也 仁廟常於內道場請▨師講論日具聽之不倦皇統▨▨▨▨▨▨▨▨▨▨▨▨▨▨▨」
於 毅宗元年丙寅下 批爲首座歷住歸信國泰重▨浮石等寺然方大蕭然無十全之儲晏如也蔚爲宗室軌▨▨▨▨▨▨▨▨▨▨▨▨▨▨」
師早蘊道德爲一代雅望迺操爲僧統皇統七年丁卯二月迎入于 大內遂命 師手削大弟頂髮禮儀之盛古無與▨▨▨▨▨▨▨▨▨▨▨▨」
▨以 師主▨焉歲在庚寅 今上踐祚復加佐世之號辛卯年秋 召至 內殿賜滿繡袈裟一領至冬百座會俾 師▨▨▨▨▨▨▨▨▨▨▨」
月少不豫門人請▨ 師曰▨之▨▨矣▨未▨呼醫巫洎六月二十九日病革迺以手指日沒處倐然而化顔色不變手足屈伸▨▨▨▨▨▨▨▨」
京東南▨法寺 上聞之震悼輟朝三日使近臣致祭於七月十六日遣殿中少監任忠質尙書戶部員外郞崔光裕內侍含慶殿錄事▨▨▨▨▨▨」
國師贈諡曰玄悟是月十七日茶毗于東林山麓是年十一月歸厝于長湍縣大倬山也比葬五色氣如虹行隨柩車見者咸驚異之目▨▨▨▨▨▨」
骨皆▨▨▨▨之春秋五十三臘三十九 師天資謙謹以儉約檢身不求贏餘喜慍不形於色好善忘勢雖至厮養莫不待之以厚焉臣甞聞之傅▨」
富與貴是人之所欲也不以其道淂之不處也又曰不義而富且貴於我如浮雲 師以宿德秩高於僧統則以道處貴也儉約不求餘則耻不義之」
富也以貴下賤則恭而有礼也豈古所謂篤行君子耶且至人遊乎天地之一氣以生爲附贅懸疣以死爲决疣潰癰則雖化而爲鷄爲彈爲鼠肝爲蟲」
臂亦何戀哉所以 師之於疾病視死生爲一體不禱不毉▨順而歸▨則知師之存心異乎人之存心也歟門人具狀以聞曰吾師之骨已赴宅垂」
宜有以誌之敢以誠請 上命臣知命銘之臣無它技粗巨文字立身旡可▨▨以辭乃據門人所錄强序而銘曰
十方世界華蔵坫塵 師之游戲如海之鱗一去一來體道之眞大空之心萬像之身濯濯水月英英花春刧風忽起兮身▨一落情雲散盡兮心月孤
輸旣已能福利三韓兮風恬浪靜於一國又烏知却向他方兮布慈雲甘露而行化如神鏤氷琢雪功跡略陳流芳萬古久而彌新

주석

  1. 온라인 참조: "서봉사지현오국사탑비문(瑞鳳寺址玄悟國師塔碑文)",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원.
  2. 온라인 참조: "서봉사지현오국사탑비(瑞峯寺玄悟國師塔碑)",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