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중공업"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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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15일 (목) 12:13 기준 최신판
사진 http://blog.naver.com/kkkk8155/140197538129
좋은 글 [1] http://ksme.or.kr/UploadData/Editor/EmBody/201411/1DD8692923FB4B2A9ACF50183A28D910.pdf
굿굿!!
김우중 회장이 대표 이사로 취임했다. 김우중 회장의 특기는 현장파악을 최우 선 과제로 삼는 것이었다. 그는 공장 현장에서 침식을 하면 서 한국기계를 살리는 일에 몰두하였고 한국기계의 장래 는 디젤엔진 생산보다는 수요가 급증할 것으로 예상되는 지게차와 굴착기 제조에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언제나 현 금흐름을 중시했으며 이를 잘 요리하여 경영의 천재가 되 었다. 한국기계의 자본금을 120억 원에서 250억 원으로 증 자한 김우중 회장은 1976년 10월 대우기계에 한국기계를 흡수합병하고 대우중공업(주)로 사명을 변경하고 대우기 계는 창원기계사업본부로 변경하였다. 이래서 대우기계가 추진하던 공작기계사업은 창원공장에서 계속하게 되었으 며 인천공장과 부곡차량은 대우중공업의 3개 사업본부로 개편되었다.
대우중공업 인천공장의 디젤엔진사업부는 연산 6만 대 생산능력을 가진 세계유수의 서독 MAN엔진 생산기지였 다. 이 규모는 정부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기는 했어도 당시 우리나라 상용차 생산규모로 보아 지나친 규모였다. 한국 기계의 디젤엔진은 주로 버스에 장착되었는데, 트럭생산 전문업체인 기아산업으로서도 상용차에 이제는 민영화가 된 대우의 디젤엔진을 사용할 생각이 거의 없었다. 더구나 막 포니로 자동차업계의 선두주자로 등장하고 있던 현대 자동차에서도 독자의 디젤엔진(Perkins Engine) 생산계획 을 가지고 있어 대우중공업의 디젤엔진을 현대자동차의 상용차에 강제할 수 없었다. 정부에서는 국내 어선의 동력 화를 강력하게 추진하면서 한국기계에 업무를 맡겼으나 그 수요에도 한계가 있었다. 결국, 한국기계의 디젤엔진공 장 건설은 수익성을 외면한 정부의 국산화 의지였으며 정 부정책을 과신한 김창원 회장의 투자실패였다. 대우중공업은 산업기계공장의 시설을 재정비하여 지게 차 전용생산라인을 구축하였다. 지게차 생산은 이미 1967 년 9월 한국기계가 일본의 고마쯔 사와 기술제휴를 하고 국내에서 조립생산하고 있었으나 아직 수요가 폭발하고 있지 않았는데, 김우중 회장이 대표직을 맡으면서 중점적 으로 판촉과 국내 생산을 추진하였다. 대우중공업은 1977 년 2월 일본의 히다찌(日立) 사와 기술제휴로 굴착기46와 유압크레인 생산설비를 갖추고 산업기계의 지게차공장을 흡수하여‘중기사업본부’로 정식 발족시켰다. 김우중 회 장은 건설중장비의 수요가 격증하리라고 예측하고 이 분 야에 선두진입하기 위한 발 빠른 행보를 띠웠다. 즉 미국의 유명한 캐터필러(Catapillar) 사와 불도저, 로더, 그레이더 등 수량은 많지 않으나 세계 제일의 중장비업체와 계약하 여 협력관계를 수립하고 창원공장에 종합건설중장비 공장
을 건설하기 위해 기왕의 히다찌 사와 새로 떠오르는 일- ↑ 김천욱, 「한국기계공업사-43」, 『기계저널』, 제54권, 제11호, 2014, 52-3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