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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개념정보 |대표명칭 = 군기시 |DB유형 = 민족기록화 |한글표기 = 군기시 |한문표기 = 軍器寺 |이칭표기 = |시대 = 고려~조선 |분야 = 제도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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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15일 (목) 12:13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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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병조에 속한 아문으로서 고려시대부터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1392년 군기감(軍器監)을 설치했다가, 1466년(세조 12) 군기시로 개칭했다. 병조판서나 병조참판 중에서 1명, 무장(武將) 중에서 1명을 뽑아 도제조(都提調)와 제조를 맡아 감독하게 했으며, 기술직인 공장(工匠)들이 몇백 명 속해 있었다. 세종 때에는 서북 변경의 개척으로 화기사용이 빈번해지자 군기시에서의 화약기술의 확보를 위해 화약장(火藥匠)의 전지전출을 견제했고, 군기시 안에 화기를 전담하는 10여 인의 관원을 두기도 하였다. 이들은 양반 자제 중에서 기술이 정교하고 무략(武略)이 뛰어난 자를 뽑은 것으로 일명 겸군기(兼軍器)라 불렀다.
그러나 세조 이후 오랜 기간 전쟁이 없게 되자 군기시의 기능은 차츰 해이해져서 본래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다. 1884년(고종 21) 군기시가 폐지되자 그 직무는 기기국(機器局)으로 옮겨졌다.

민족기록화와의 연관성

군기시는 후에 최대섭의 민족기록화 '화포와 화약을 제조하는 최무선'의 주요 인물 최무선에 의해 설치된 화통도감에 흡수되었다.
최무선의 아들 최해산이 근무하기도 하였다.

노드 및 관계 테이블

노드 관계 노드
화통도감 ~에 흡수되었다 군기시
최해산 ~와 관련된다 군기시
군기시 ~의 제조지이다 화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