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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15일 (목) 12:22 기준 최신판

탑비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비
한자 原州 法泉寺址 智光國師塔碑文
승려 해린(海麟)
찬자 정유산(鄭惟産)
서자 안민후(安民厚)



번역문

  • 출처: 이지관,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고려사2, 가산문고, 1995.[1]


시호(贈諡) 지광국사(智光國師) 현묘지탑비명(玄妙之塔碑銘) (題額) 고려국(高麗國) 원주(原州) 법천사(法泉寺) 강진호도(講眞弘道) 명요돈오(明了頓悟) 계정고묘응각(戒正高妙應覺) 탐현도원(探玄道源) 통제연오법동(通濟淵奧法棟) 구행요성도수(具行了性導首) 융소랑철(融炤朗徹) 증시광국사(贈諡智光國師) 현묘지탑비명(玄妙之塔碑銘)과 아울러 서문(序文) 중대부(中大夫) 문하시랑(門下侍郞) 동중서문하(同中書門下) 평장사(平章事) 판상서(判尙書) 예형부사감(禮刑部事監) 수국사(修圀史) 겸태자대부(兼太子大傅) 상주국(上柱國) 신(臣) 정유산(鄭惟産)은 왕명(王命)을 받들어 비문을 짓고 승봉랑(承奉郞) 상서도관(尙書都官)낭중(郞中) 비어대(緋魚袋)를 하사받은 신(臣) 안민후(安民厚)는 칙선(勅宣)을 받들어 비문과 전액(篆額)을 쓰다.

신(臣)이 듣건대, 구담미(瞿曇彌)께서 묘음(妙音)을 부연(敷演)하시니 삼마지(三摩地)에 뻗쳤으며 소반도(蘇槃度)로써 고론(高論)을 성취하였다. 팔식(八識)의 근원을 궁구하고 알선하여 유식(唯識) 상응(相應)의 진종(眞宗)을 개창하였고 점차 널리 정교(政敎)를 현양(顯揚)하였으니, 이는 아상(我相)과 팔상(人相)을 벌유(筏喩)에서 경계하고 주재(主宰)와 궤지(軌持)를 나타내었다. 비록 지극한 이치는 허현(虛玄)에 그 근본을 두었으나 평등하여 차별이 없고, 모든 근기(根機)가 영리하고 어리석은 것을 말미암아 깨달음에도 천심(淺深)이 있으니, 우미(愚迷)한 중생을 급인(汲引)함에 있어서는 권실(權實)의 교리(敎理)를 지진(指陳)하였다. 점차 시간이 흘러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지 더욱 멀어져, 상법시대(像法時代)를 지나 말법기(末法期)에 접어들면서 부처님께서 남기신 유문(遺文)이 점점 무너졌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현장법사(玄奘法師)와 같은 스님이 상속(相續) 출세하여 아수라(阿修羅)의 굴(窟)에 뛰어들어 권권복응(拳拳服膺) 하였으며, 보승(寶乘)을 돈독히 신봉하여 칼날 같은 변재로 널리 홍포(弘布)하였다. 진(晋)나라 때 번역한 경전들의 내용을 승습(承襲)하여 그 오묘한 이치를 터득하고 아울러 무너진 강령(綱領)을 떨쳤으며, 수역(隋譯)된 경전에 따라 그 심오(深奧)함을 끌어내었으니 이는 다 함께 끊어진 단추를 다시 이은 것이다. 동쪽으로 전래된 법(法)이 특이한 것이 아니니 내향자(內向者)의 마음이 그 마음 스스로 통달한 것 뿐이다. 그러므로 간간이 헌걸한 괴웅(魁雄)이 출세하여 선현들의 자취를 밟아 무윤(胤)이 되어 그 위명(威名)을 현겁(賢劫)에 떨치고, 계정(戒定) 등의 삼학(三學)을 범제(梵題)에서 연마하였다. 자씨(慈氏)의 신분이 양무제(梁武帝) 때 쌍림부대사(雙林傅大士)로 강림한 것을 본받았으며, 문수보살이 자취를 나투어 서주(西周) 목왕(穆王) 때 중국으로 불교를 전래한 것과 같다고 하겠다.

널리 동국(東國)인 인▨(仁▨)을 교화하되 상(象)·정시대(正時代)의 법(法)을 크게 홍포하고, 성조(聖祚)를 위해 정성껏 기도하며 임금을 도와 홍균(鴻均)을 이루게 한 스님은 오직 우리 국사(國師) 뿐이라 할 것이다. 스님의 휘는 해린(海麟), 자는 거룡(巨龍), 속성은 원씨(元氏), 어릴 때의 이름은 수몽(水夢)이었으며 원주(原州) 출신이다. 고조부와 증조부 때부터 선행을 쌓고 경사스러움을 행하였다. 희역(犧易)과 안정(安貞)의 인요(因繇)를 상고해 보건대, 길(吉)·흉(凶)·회(晦)·린(悋) 중의 회(晦)로 말미암아 밝혔으며, 언승(彦升)이 검소하며 절약하였던 가풍(家風)을 지키고 그 순박한 바탕을 깨뜨리지 아니하였다. 할아버지의 휘는 길견(吉肩)이니, 마음은 서수(筮首)로 점을 쳤으며, 음양(陰陽)을 연구하여 상징을 나타내었으니 어찌 운수가 불길하게 변하는 것을 보고 구차하게 그를 면하려고 하였겠는가! 찬구(鑽龜)타와(打瓦)의 점을 쳐서 그로부터 얻은 조짐으로 의심하였던 운수를 예지하여 세상일로 하여금 미혹함이 없었다.

아버지의 휘는 휴(休)이니 관직은 아관(衙官)에 이르렀는데, 모든 사람들이 선연(先掾)들보다 뛰어난 관리라고 칭송이 자자하였다. 일찍부터 훌륭한 상황(床喤)의 아들 낳기를 염원하여 항상 초연(椒衍)의 시(詩) 듣기를 원하였다. 어머니는 이씨(李氏)니 영리함은 제호(提壺)에 계합하고 공손함은 거안(擧案)보다 더 얌전하였다. 끝없는 원력(願力)은 광목부인(光目婦人)과 같고 용모의 아름다움은 묘안(妙顔)임을 알 수 있다. 일찍이 성선(聖善)의 태몽에 하해(河海)의 물이 맑게 범렴(泛瀲)하고 정천(井泉)에서는 물이 솟아 올랐다. 이로 인하여 임신하고는 일과로 탄기(呑氣)를 행하여 태아를 교육하였다. 이에 미루어 보면 어찌 발자취를 밟고 잉태하여 태어난 강원(姜嫄)을 부러워하겠는가? 탁태(託胎)할 때에는 그윽히 왕소(王邵)의 경우와 같았다. 이미 만삭이 되어서는 드디어 그 상서(祥瑞)를 발(發)하였다. 옹희(雍熙) 원년(元年) 세재(歲在) 알봉군탄년(閼逢涒灘年) 도월(涂月) 그믐날 사제(私第)에서 탄생하였다.

어릴 때의 이름은 수몽(水夢)이었다. 옛날 중국에서 주(周)나라 명왕(明王) 24년에 강하(江河)와 천지(泉池)가 홀연히 범람하였으니, 이것이 부처님께서 탄생하신 상서(祥瑞)였는데,이것을 우리 국사의 탄생과 비교하면 그 시종(始終)의 징조가 하나도 다름이 없다. 국사는 일자분정(日蔗分精), 즉 태양의 정기를 타고 났으며, 연꽃과 같은 향기롭고 아름다운 성품을 받아 태어났다. 의지는 탐애(貪愛)를 단제하는데 예리하였고 마음은 색신(色身)과 명예(名譽)를 위하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초년(齠年)의 나이에 이르러 이미 학문에 뜻을 두어 이수겸(李守謙)을 찾아가서 학업을 청하였다. 수겸(守謙)이 스님을 보고 특이한 그릇인줄 알고 말하기를, “나는 석학(碩學)이 될 기량(器量)을 지도할 능력이 없으니 너는 마땅히 밝은 스승을 찾도록 노력하라.” 하였다. 어느 날 관상을 잘 보는 한 노인이 있어 스님의 손금을 보고 국사에게 이르기를, “네가 만약 출가하여 스님이 된다면 반드시 세상에서 가장 귀한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예언하였다. 앞으로 통인달사(通人達士)가 되리라는 말을 듣고 다만 도주(道籌)에 종사할 생각에만 골똘히 잠기고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에는 관심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노장(老莊)의 개설(槪說)에 대해서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따라서 사대부들의 헌면(軒冕)을 치수(錙銖)처럼 보고 고량진미(膏粱珍味)를 마치 강비(糠秕)와 같이 여겼다.

급히 서둘러 법고사(法皐寺)의 관웅대사(寬雄大師)의 처소로 가서 수학하던 중 관웅(寬雄)스님이 경화(京華)인 개성으로 떠났으므로 국사도 그 산중(山中)을 하직하고 떠나게 되었다. 관웅대사가 배를 타고 강을 건너 오운산(五雲山)을 벗어나자마자 스님은 곧 걸망을 짊어지고 따라갔다. 천리를 멀리 여기지 않고 함께 연하(輦下)로 돌아갔다. 이어 곧 산의 서쪽을 점지(占地)하였는데 해안사(海安寺)와 선접(旋接)한 곳이었다. 준광방장(俊光方丈)에게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어 수도(修道)하면서 함장(函杖)에게 욕의(縟儀)를 펴고 시봉하기를 희망하며 정성을 다하여 표질(縹帙)을 관화(貫花)에서 연마하였다. 위(魏)나라의 창서(蒼舒)가 코끼리의 무게를 작은 저울로 알아 내던 나이에 이미 불교를 전해 듣고 알았으며, 가위나국(迦衛羅國) 구오사미(驅烏沙彌)의 류(類)와 같은 어린 나이에 이미 모든 사람들이 김공(金公)이라 존칭하였다. 그는 기연(機緣)을 검괄(檢括)하여 종요(宗要)를 격양(激揚)하되, 한가지를 들으면 천 가지를 깨달아 진도(進度)의 결과가 그의 엄사(嚴師)보다 배(倍)나 높았다. 양지(兩智)와 삼명(三明)으로 도덕이 높아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계승하였다. 이와 같이 영특함을 알게 된 웅공(雄公)은 기꺼워하면서 해린(海潾 : 潾은 麟의 오자)이라 이름을 지어 주었다. 통화(統和) 17년 수하(首夏)의 달에 용흥사 관단(官壇)에서 구족계를 품수(稟受)하였다. 탐·진·치의 마음을 씻어 그 오염(汚染)을 여의었으니 마치 손으로 공중(空中)에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았다. 29살 때 숭교사(崇敎寺)를 창건할 때 감독을 맡았던 은공(恩功)으로 그 절의 초대(初代) 주지가 되었다. 자운사(慈雲寺)에서 거행하는 창살도량(唱薩道場)에 나아가서 부처님께 향을 올려 기도하였다. 어느 날 관웅(寬雄) 스님이 법천사(法泉寺)에서 잠을 자고 있는 동안 꿈에 새매 한 마리가 날아오는 것을 보고 왼쪽 손을 펴서 손바닥에 받들었다. 또 두 마리의 산군(山君)이 절 후원(後園)에 들어와서 서로 뛰고 놀다가 날이 밝아지자 떠나간 일도 있었다. 관웅(寬雄) 스님이 이를 이상하게 여겨 기억하고 있었는데, 다음 날 국사께서 본사(本寺)를 찾아왔으니 이것이 바로 그 꿈의 감응(感應)인 것이다. 또 어느 날 꿈에 바닷가에 가서 손으로 직접 작은 고기를 잡아서 삼키고 꿈을 깨었는데, 해몽하는 사람이 말하기를, “어(魚)는 비늘(鱗)을 뜻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므로, 린(麟)을 린(鱗)으로 고쳐 해린(海麟)을 해린(海鱗)으로 개명(改名)하고, 자(字)를 거룡(巨龍)이라 하였던 것이다.

나이 21세 때 왕륜사(王輪寺) 대선장(大選場)에 나아가서 담경(談經) 시험을 보았는데, 그의 말은 평범하나 그 뜻은 매우 심오하였다. 시험의 문제는 같았으나 국사의 답안은 다른 사람들보다 특이하였다. 저들 자신의 답안이 틀려서 자신의 소망에 어긋난 자들은 마치 소경이 촛불을 잡은 것과 같았으며, 혹은 시기하여 머트럽게 다투던 자들은 마치 함장(銜杖)한 것과 같이 입을 열지 못하였다. 마음에는 모든 반연을 쉬었으니 감히 파도가 물에 의지한 것을 탄식할 것이며, 진여법(眞如法)은 모든 움직임을 여의었으니 마땅히 탁약(槖籥)의 가풍(假風)을 비웃을 수 있겠는가. 토의하는 광장(廣場)에서는 주위로부터 집중적인 공세를 받았으나 마치 교범파제(憍梵婆提 : gavāṃpati) 등의 호부장자(豪富長者)들로 구성된 그룹의 첩벽(疊壁)이 무너지고 모두 논리에 강복(降伏)하고 부처님께로 귀화한 것과 같았으며 견고한 인욕의 갑옷이여! 니건자(尼乾子)를 비롯한 외도(外道) 육사(六師)들의 일(一)·이(異)·유(有)·무(無) 등의 교란적인 주장이 부처님 사자후(獅子吼)의 일성으로 말미암아 모두 사라진 것과 같았다.

국사께서 법상(法床)에 앉아 불자(拂子)를 잡고 좌우로 한번 휘두르니 가히 청중들이 많이 모여 앉은 걸상이 부러진 것과 같았다. 임금이 국사의 도덕을 찬양하고 대덕(大德)의 법계를 서증(署贈)하였다. 이 때 스님께서 이르기를, “내가 의룡(義龍)과 서성(瑞聖)인 후배에게는 부끄럽지만 인수(仁獸) 보다는 앞서기를 기대하므로 인자(麟字)를 인(鱗)으로 이름을 고치겠다.”고 하였다. 통화년중(統和年中)에 “강진홍도(講眞弘道)”란 법호를 받았으며, 28년에는 국사께서 법고사(法皐寺)로 돌아가는 길에 도강(都講)인 진조(眞肇) 스님을 만나 동행하다가 진조(眞肇) 스님이 역산(曆算)하는 법을 잘 안다는 말을 듣고 국사께서 가르쳐 주기를 청하였는데, 누구나 이를 취하려 하면 손바닥을 뒤집는 것보다 쉽고, 도모하여 옮기면 밝아서 소경이 눈을 뜬 것과 같이 여용(餘勇)을 보통 무리들에게나 끼쳐주며, 다능(多能)을 비루(鄙陋)한 것을 연구함과 같았다. 통목화(統木禾) 말년은 우리 성고(聖考) 현종(顯宗)께서 보위에 오르신지 5년째 되던 해이다. 특히 현종 임금으로부터 존장(尊獎)하는 은총을 입어 대사(大師)의 법계를 받았다.

대중상부(大中祥符) 10년에는 ‘명료돈오(明了頓悟)’란 법호를 증사(贈賜)받았고, 천희(天禧) 5년 호경(鎬京) 중흥사(重興寺)에서 여름 결제(結制) 중에 강경법회가 있었는데, 국사께서 법을 설하시니, 그 법의 혜택이 화택 중생들에게 두루 미쳐 마치 새벽 기온처럼 청량(淸凉)하게 만들어 주었다. 자비의 등불을 혼구(昏衢)의 밤거리에 비추어 축건(竺乾)의 서래밀지(西來密旨)를 깨닫게 하였다. 국사가 매일 한 번씩 기자(箕子)의 고도(古都)를 일컬으면 대중은 세 번씩 창송하였다. 그 후 기숙(耆宿)인 선공(先公)의 사회사소(社會詞疏)가 문리(文理)가 맞지 아니함을 보고 고쳐 지어주면서 (결락) 도(道). 지만적(枝蔓的)인 부사(浮辭)는 잘라 버렸다. 스님은 아무렇게나 말을 하여도 곧 훌륭한 문장을 이루게 되었으니, 혜거(惠璩)의 문장력도 혼비백산하였고, 문장을 나누면 척척 음운에 부합하였으니 담빙(曇憑)의 음운학(音韻學)의 실력도 부끄러워할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그의 주연(遒姸)하고 민첩함을 누가 능히 그를 적대(的對)할 수 있겠는가! 태평년중(太平年中)에 중대사(重大師)의 법계를 진정(進呈)하고 아울러 ‘계정고묘응각(戒正高妙應覺)’이란 법호를 올리고는 수다사(水多寺)를 맡도록 하였다. 태평(太平) 10년에 이르러 현종이 칙명으로 해안사(海安寺)로 이주하도록 앙청(仰請)하였다. 그 후 덕종(悳宗)이 즉위하여서는 보다 더욱 존중히 모시는 한편 특별히 삼중대사(三重大師)의 법호를 수정(授呈)하고 아울러 마납(磨衲)으로 만든 법복 한 벌을 증사(贈賜)하였으며, ‘탐현도원(‘探玄道源)’이라는 법칭(法稱)을 첨가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되지않아 수좌(首座)의 법호를 올리고 겸하여 마납(磨衲) 복전의(福田衣) 한 상자를 하사하였다. (결락) 자심(滋深)하거늘 어찌 우물안 개구리가 바다의 깊음를 측량할 수 있겠는가. 치류(緇流)들이 환희심에 넘친 마름으로 경하(慶賀)하여 하연(廈燕)이 투서(投棲)함을 경멸히 여겼으니, 지광국사(智光國師)는 마치 각왕(覺王)의 출세가 아닌가 하여 의심할 정도였다. 다행히 인주(仁主)와 동시에 출세하여 그의 법음(法音)은 마치 바다를 덮을 정도로 해조음(海潮音)과 같으며, 현하(懸河)와 같은 변재는 그 도도하며 민첩함을 이루 다 형언할 수가 없다. 중희년중(重熙年中)에 ‘통제연오법동(‘通濟淵奧法棟)’이라는 법호를 가상(加上)하였다. 갑자기 어느 날 선조(宣詔)를 보내 궁내로 영입하여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연설토록 하였다. 국사는 궁중의 높은 섬돌을 밟고 예상(猊床)인 법상에 올라 앉아 법우(法雨)를 내려주어 진리를 표하고 정법(正法)을 나타내었다. 우거(牛車)에 따른 오지(奧旨)의 관기(關箕)를 활짝 열어 무명인 혹(惑)을 전제(剪除)하고 의문(疑問)의 구름을 휘산(揮散)하였다. 맹구우목(盲龜遇木)과 같이 만나기 어려운 묘법(妙法)을 들은 임금은 마음에 크게 감동하였으니, 어찌 귀중한 보배와 사사공양(四事供養)을 하사하는데 인색하였겠는가! 특별히 가는 실로 수를 놓은 당상복(幢相服) 두 벌을 하사하였다. 14년에는 발탁하여 승통(僧統)의 법계를 올렸다. 지금의 임금이신 문종이 즉위하여 하(夏)나라의 정통을 계승하여 국민에 임(臨)하였으며, 마치 주(周)나라의 무왕(武王)이 은(殷)나라의 폭군 주왕(紂王)을 견제(甄除)하고 인정(仁政)을 펴서 홍업(洪業)은 이미 의삭(懿鑠)에 이르렀으며, 약성(瀹誠)은 나마(那摩)에 간절하였다. 왕이 국사를 임궁(琳宮)으로 초빙하여 유심(唯心)에 대한 묘의(妙義)를 강설케 하고는 마납(磨衲) 비단으로 만든 승가리 (僧伽梨) 한 벌을 하사하였다.

궁중(宮中)의 구중(九重)에서부의(負扆)하고 있는 임금께서 친히 상보(象步)하는 용상대덕(龍象大德) 스님들을 영접한 백고좌(百高座)는 모두 용문(龍門)을 뛰어넘는 오도견성(悟道見性)한 도인들이었다. 담수(曇邃) 스님은 북좌(北座)에서 정통(精通)하였음을 부끄러워 했고, 승철대사(僧徹大師)는 편독(篇牘)과 시부(詩賦)에 뛰어나 낙필성장(落筆成章)하는 문호(文豪)이므로 많은 대덕(大德)들을 제치고 왕으로부터 총석(寵錫)받은 것을 사양할 정도였다. 그리고 중희년중(重熙年中)에 거듭 다시 ‘구행료성도수(具行了性導首)’라는 법호를 첨가(添加)받았다. 또 기원(祇園)의 적손(嫡孫)이니 이는 오직 불교가 중흥할 인유(因由)인 것이다. 척리(戚里)의 신동(神童)들이 예문(禮聞)을 거치지 아니하고 와서 수학하였다. 이로써 작고(作故)하신 수대사(守大師)의 문하시중(門下侍中)이며 중서령(中書令)을 추증(追贈)받은 장사공(章私公) 이씨(李氏)의 휘는 자연(子淵)이니, 드디어 다섯째 아들을 허락하여 그로 하여금 락발(落)하고 정성을 다하여 국사에게 구의(摳衣)하고 신족(神足)이 되어 복근(服勤)하기를 희망하였다. 그리하여 국사가 직접 찾아가서 친견하고 찬앙(讚仰)하였으니, 그 분이 누구인가? 지금의 금산사(金山寺) 주지로 있는 삼중대사(三重大師)인 소현(韶顯)이 바로 그 스님이다. 국사는 부모를 하직하고 속가를 떠나 입산(入山)하였다. 음식을 항상 절제하여 묘재(卯齋)인 아침 공양만 먹었다. 초액(椒掖)의 후비(后妃)를 살펴 보건대 모두가 동기(同氣)이며, 악루(萼樓)의 형제들은 함께 외손(外孫)인 것이다.

이 사람은 도(道)의 극치를 이루었을 뿐 아니라 유교와 불교를 두루 통달하여 그와 대등한 자가 없었다. 덕행(德行)과 문장(文章)이 노당(魯堂)의 십철(十哲)을 크게 엄압(掩壓)하였고 자비와 지혜는 위사(魏寺)의 천승(千僧)보다 훨씬 초월하였다. 자질(資質)은 현반(玄班)을 크게 높혔고, 법력(法力)은 온 세상의 중생을 부호(扶護)할 만 하였다. 국사의 문하(門下)가 왕성하고 장려(壯麗)함이 스님보다 더 큰 스님은 없었다. 중희(重熙) 23년 남녀월(南呂月)에 성칙(聖勅)을 내려 현화사(玄化寺)로 이석(移錫)케 하므로 국사는 고사하였으나 하는 수 없이 마침내 허락하였다. 임금께서 유마(騮馬) 일필(一匹)을 이에 앞서 절에 희사(喜捨)하였다. 갑자기 한 비구가 와서 말을 희사한 데 대해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는 잠시 후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어 간 곳을 알지 못하였으니 이는 문수(文殊)의 화현(化現)인 성승(聖僧)의 영험인 것이다. 현화사(玄化寺)에 입사(入寺)한 후 어느 날 후야분(後夜分) 혼허(魂栩)할 무렵, 한 스님과 같이 있었는데, 그 곁에 신인(神人)이 서서 말하기를, “너는 국사(國師)이고, 저는 왕사(王師)이다.”라고 하였다. 잠을 깨었으나, 그가 말한 소리는 아직도 귀에 역력하였다.

아름다운 징조이며 특별한 서록(瑞錄)이라 칭송되어 길음(吉音)이 환구(環區)인 온 세상에 가득 하였거든, 하물며 국사가 어찌 내종(內宗)에만 편국(偏局)하였겠는가! 또한 외전(外典)도 두루 겸통(兼通)하였다. 날 때부터 이미 여러 가지 묘법(妙法)을 알았을 뿐 아니라, 숙령(夙齡)의 어린 나이에 주발(朱勃)과 같은 천재를 업신여길 정도의 재동(才童)이었다. 아주 많은 서적을 독파하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혜초(惠超) 스님을 능가하였다고 칭송이 자자하였다. 학사(學士) 뿐만 아니라, 사봉(詞峯)은 태양을 의지하며 필총(筆塚)은 하늘을 받들었다. 경구(警句)를 독실하게 공부하여 거유(鉅儒)로써의 과문(寡聞)한 이에게 영향을 입혔다. 화탕(和湯)한 개사(開士)가 벽운시(碧雲詩)의 아작(雅作)을 읊었으니, 이것이 어찌 괴기(瓌奇)한 명문(名文)이 아니겠는가! 이에 비하면 이적선(李謫仙)의 백설시(白雪詩)의 청음(淸吟)도 진실로 쇄미한 졸작이라 할 것이다. 치소(緇素)의 무리들과 비교하더라도 또한 동년(同年) 선상(線上)에 두고 말할 수 없다. 혹은 유교와 불교를 기빙(期憑), 즉 비교해 보건대, 범복(梵福)이 더욱 수승하였다.

신도(宸圖)께서 정재(淨財)를 기울여 현화사(玄化寺)의 보수공사에 필요한 공사비를 국가에서 부담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개필(愷筆)을 불러 수용(睟容)의 탱화를 그리고 한편으로는 부종(鳧鍾)을 주조하며, 일체법구(一切法具)를 마련하였다. 이와 같이 보수한 보찰(寶刹)이 그 장려함이 마치 도사다(覩史多)의 천궁(天宮)을 옮겨 놓은 것과 같았다. 금언(金言)인 경전을 판각(板刻)하여 명(名)·구(句)·문(文)인 구나(拘那)의 용궁해장(龍宮海藏)을 담았으니 이것이 이른 바 시단(始檀)이라 하겠다. 그리하여 사홍서원(四弘誓願)을 일으켜 마침내 원만하게 성취하고, 임금이 지광국사(智光國師)를 스승으로 모시고 사자(師資)의 큰 인연을 맺었다. 이와 같이 모든 악(惡)은 짓지 아니하는 한편 여러 가지의 선(善)한 일을 봉행(奉行)한 일들을 어찌 이루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청녕(淸寧) 2년 1월 일에 임금께서 이르기를, “대붕새도 늙어지면 법(法)이 아니면 그 미혹(迷惑)함을 구제할 수 없고 성스러운 병아리라도 스승이 아니면 법익(法益)을 청(請)할 수 없다.”고 하였다. 진실로 능히 법(法)을 깨달은 이라야 가히 스승이 될 수 있다.

특별히 국서(國書)를 보내 초청하였다. 드디어 공부시랑(工部侍郞) 장중영(張仲英), 상서(尙書) 좌승(左丞) 유신(柳紳)과 예부시랑(禮部侍郞) 김량지(金良贄) 등을 보내되, 세 번이나 되풀이하는 삼반(三反)의 예(禮)를 갖추고는, 이어 다시 중추원사(中樞院事) 이유충(異惟忠)을 보내어 왕이 수결(手結)하고 압인(押印)한 편지와 함께 금계법복(錦罽法服)과 은(銀), 황유(黃鍮)로 만든 기물(器物)과 향천(香荈) 등을 보냈다. 국사는 굳게 사양하였으나 마침내 왕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그 해 11월 4일 대가(大駕)가 내제석원(內帝釋院)으로 행행(行幸)하여 예배(禮拜)를 갖추어 왕사(王師)로 추대하였다. 그 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어가(御駕)에 동재(同載)하고 다녔으니, 마치 강승회(康僧會) 스님이 오왕(吳王) 손권(孫權)의 어가(御駕)에 동승하고 다녔던 것은 모두 스님의 하풍(下風)에 있었기 때문이다. 청녕(淸寧) 3년에 이르러 ‘융소(融炤)’라는 법칭(法稱)을 진정(進呈)하였다. 4년 5월 초하루에 임금께서 스님을 국사(國師)로 책봉코자 하여 친서를 보내 삼청(三請)하였다. 그리하여 그 달 19일 왕이 금가(金駕)를 준비해 봉은사(奉恩寺)로 행행(幸行)하여 우리 해린(海鱗) 스님을 국사로 봉하고, 영통사(靈通寺)의 주승(主僧)인 난원(爛圓) 스님을 왕사(王)로 책봉하였다. 연진(涓辰)을 택하여 아울러 위대한 칭호(稱號)인 법칭(法稱)을 봉정(奉呈)하였으니, 양상(兩相)이 부합되었다. 같은 날에 두 스님이 함께 지총(摯寵)을 받았으므로 이미(二美)가 동시에 나타난 것이다.

그 까닭을 살펴보니 미증유(未曾有)의 희유(希有)한 일이라고 찬탄하고도 남음이 있다. 전일의 꿈에 신인(神人)이 “너는 국사(國師)이고 저는 왕사(王師)이다.”라고 한 예언이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때 꿈에 동유(同遊)하던 스님은 영통사(靈通寺)의 주지인 난원(爛圓)이 바로 그 스님이다. 5년 양월(陽月) 8일 국사께서 왕궁 내전(內殿)에 나아가서 백고좌회(百高座會)의 제일설법주(第一說法主)가 되었다. 겨우 반게송(半偈頌)을 설하자마자 청법대중이 사방(四方)으로부터 거듭거듭 모여들어 큰 성왕(盛旺)의 상서를 나타냈다. 왕이 다시 ‘낭철(朗徹)’이라는 법칭(法稱)을 진정(進呈)하였다. 함옹(咸雍) 3년 2월 일에 국사께서 법천사(法泉寺)에 돌아가 안주(安住)코자 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 모치(暮齒)의 탄식을 일으키며, 누차 임금께 사퇴(辭退)할 것을 고진(告陳)하여 세번이나 거듭 수두(需頭)의 주청(奏請)을 올려 간절한 사의(辭意)가 확고함을 알렸다. 문종은 하는 수없이 윤허(允許)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해 9월 22일 왕이 현화사(玄化寺)에 행행(幸行)하여 합원승재(闔院僧齋)를 베풀고 겸하여 국사를 석별하는 인전연(寅餞筵)도 마쳤다. 임금은 양반의 관솔(官率)을 거느리고 국사에게 하직 인사를 한 다음, 좌승선(左承宣)이며 중서사인(中書舍人)인 정유산(鄭惟産)을 파견하여 수결(手結)을 찍은 조서(調書)와 차(茶), 약(藥), 보화(珤貨) 등을 정상(呈上)하였는데, 그 이름과 수가 너무 많아 산제(刪除)하고 싣지 않는다. 국사는 이 달 27일 출발하여 본산(本山)인 법천사(法泉寺)로 떠났다.

임금이 태자(太子)에게 명하여 제왕백료(諸王百僚)를 거느리고 남교(南郊)까지 가서 전별(錢別)케하고 특별히 도속(道俗)의 관원(官員)을 보내어 본사(本寺)까지 호송(護送)토록 하였다. 국사께서 본산(本山)인 법천사(法泉寺)에 돌아간 후, 3년 만인 중하지월(仲夏之月)에 성상(聖上)이 연덕궁(延德宮)의 제6왕자로서 체발(剃髮)하고 스님이 되어 현화사(玄化寺)에 있게 하였다. 이전에는 봉천원(奉天院)에 주석하다가 특히 수좌(首座)의 법계를 증수(贈授)받았으니, 이는 국사의 주변에 있으면서 깊은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이 해 10월 23일 편안히 우협(右脇)으로 누워 취침하였다. 이날 밤에 이슬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국사께서 잠을 깨어 가부좌(跏趺坐)를 맺고 앉아 제자들에게 이르기를, “(결락) 바깥 날씨가 어떤가?”하니 대답하기를, “이슬비가 내리고 있읍니다.”라는 대답을 듣고서 곧 입적하였다. 옛적 추자(鶖子)가 입적(入寂)함에 당하여 무색계(無色界)의 제천(諸天)이 흘린 바 눈물이 마치 봄에 내리는 이슬비와 같았으니, 지금 국사께서 시화(示化)하던 오늘밤에 내린 비인들 어찌 제천(諸天)이 흘린 눈물이 아니겠는가.

오호 애재(哀哉)라! 세수는 87세요, 승랍은 72세였다. 입적(入寂)하던 전날 밤에 등불 만한 크기의 두개의 별이 나타났고, 또 두 줄기의 큰 무지개가 섰는데, 마치 두마리의 적룡(赤龍)이 나란히 누워 있는 것과 같았다. 이것은 (결락) 국사께서 입적(入滅)하실 조짐을 보인 것이다. 문인(門人) 수좌(首座)인 법령(法靈)과 삼중대사(三重大師)인 소현(韶顯) 등이 가슴을 치며 발을 구르면서 부음(訃音)을 동폐(彤陛)에 주문(奏聞)하였다. 부음을 들은 문종(文宗)은 크게 진도(震悼)하시고 곧 좌가승록(左街僧錄)인 숭연(崇演)과 보장정(保章正)인 전삼린(全參藺) 등을 파견하여 장사(葬事)를 감호하도록 하였으며, 이어 전개(專介)인 특사를 보내서 빈당(殯堂)에 가서 조문토록 하되 정중한 탁제(卓祭)를 치르도록 하는 한편, ‘지광(智光)’이라는 시호를 증정(贈呈)하고 아울러 다향(茶香)과 유촉(油燭)을 하사하였으며, 또 원주(原州) 창고에 있는 양곡으로써 발천위락(拔薦爲樂)의 법요식(法要式)에 필요한 경비에 충당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11월 9일 법천사(法泉寺)의 명봉산(鳴鳳山) 동쪽 승지(勝地)를 선택하여 다비(茶毗)의 예를 거행하였다. 이 때 인간과 영기(靈祇)가 비통하며 슬퍼하고, 천지(天地)가 캄캄하며 새·짐승들은 슬피 울고, 봉만(峰巒)은 처참하게 나열(羅列)되었으니, 유정(有情)과 무정(無情) 등이 모두 국사의 도덕이 끝남에 대하여 슬퍼한 것인저!

임금께서 아름다운 궤범(軌範)을 추모하여 감히 제액(題額)을 표(標)하지는 못하지만, 황견유부(黃絹幼婦)인 절묘호사(絶妙好辭)의 명문(名文)을 새겨 정민(貞珉)을 세워 국사의 위적(偉跡)이 영원히 썩지 않게 함이다. 적자(赤髭)와 같은 위대한 행적을 빛나게 할 뿐 아니라 역대(歷代)에 유전되어 영원히 남아 있게 하고자 하여, 이에 추유(鯫儒)에게 명하시어 국사의 홍대(鴻大)하고 탁렬(卓烈)한 위업을 밝히라고 하셨다. 그러나 신(臣)의 식견(識見)은 우잠(牛涔)으로 토해(兎海)의 물을 측량하는 것과 같아서 불가능한 일이라고 사양하였지만 어찌 할 수 없었다. 그릇 윤선(綸宣)을 받드는 것은 도저히 더 이상 사양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국사의 가풍(家風)에 따라 그의 도덕을 기록하였다. 비록 견고하나 돌과 같이 궁구는 마음은 아니며 학문은 부수(膚受)이고 재조(才操)는 졸재(拙才)이다. 스스로 수중에는 한푼의 돈도 없음을 부끄러워 하면서도 문득 광비(狂斐)의 명문(名文)을 지으려고 다만 최선의 노력을 다할 뿐이다. 삼가 이상의 탁적(卓跡)을 명(銘)으로 칭송(稱頌)하노라.

무상심심(無上甚深) 미묘법(微妙法)은 석가(釋迦)가 시조(始祖)! 사십구년(四十九年) 고구정녕(苦口叮寧) 설(說)하신 내용 서건(西乾)에서 시작하여 천년후에야 가엽축법(迦葉竺法) 두스님이 동전(東傳)하였네! 일체법장(一切法藏) 진속(眞俗)으로 갈라졌으니 근기(根機)따라 설법하신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미(迷)한 중생(衆生) 제도코자 정법(正法)을 보여 실상법(實相法)을 기본(基本)하고 권법(權法) 설했네! (其一) 무상대교(無上大敎) 그 진리를 널리 펴시니 십이부류(十二部類) 중생들이 서열(胥悅)하도다. 자성천(自性天)의 혜일광명(慧日光明) 두루 비추니 언덕마다 골짝마다 밝아졌었네! 자비하신 구름으로 윤택케 하되 쑥과 난초(蘭草) 차별 없이 적셔주었다 불타(佛陀)께서 열반하신 시대가 멀어 남겨주신 그 유풍(遺風)이 멸절(滅絶)해 가네! (其二) 이심전심(以心傳心) 그 혜명(慧命)을 누가 이을까? 지광(智光)국사 스님 만이 감당할걸세. 여러 생(生)에 혁기(赫氣)모아 태어났으니 단적(端的)으로 밝은 시대 만났도다. 양친부모(兩親父母) 하직하고 애정(愛情)을 끊어 속가(俗家) 옷인 소의(素衣) 벗고 치의(緇衣)를 입다. 고상함은 석림중(釋林中)에 악봉(萼鳳)이시고 신령(神靈)함은 상서로운 시귀(蓍龜)와 같네! (其三) 지극하신 정성으로 발심(發心)하였고 입으로는 발원(發願)하고 반야(般若)를 닦았다. 안으로는 팔만장경(八萬藏經) 연구하면서 밖으로는 유교(儒敎)사상 공부하였다. 품계(品階)로는 삼현(三賢)아닌 십지(十地)이시고 거룩하신 그 칭송(稱頌)은 천하에 떨쳐 복(福)과 지혜(智慧) 함께 구족(具足) 양족(兩足)하시어 일체세간(一切世間) 살펴봐도 견줄 자 없네! (其四) 계현논사(戒賢論師) 화현(化賢)으로 다시 오신 듯 무착보살(無着菩薩) 도생위(度生爲)해 거듭 나투다. 반야덕(般若德)의 병(甁) 속에는 진리 가득히 거울같이 밝은 마음 더욱 밝도다. 모든 상문(桑門) 수행자(修行者)엔 표본이 되고 예달(蘂闥)까지 그 이름이 가득하였다. 요황(瑤皇)께서 초빙하여 법문(法門) 들었고 보세(寶世)에는 수도대중(修道大衆) 번영하였다. (其五) 스님께선 덕이 높아 국사(國師)되셨고 모든 일은 평범하게 처리하였다. 자나깨나 국민 위한 일념(一念) 뿐이며 영원토록 큰 원력(願力)을 굳게 가지다. 세상만사 모든 것은 점위(阽危)한 것 뿐. 환봉(圜封)속에 갇히어서 이미 늙었네! 여산(廬山)같은 본산(本山)으로 되돌아가서 정진(精進)하고 기도하여 고년(高年)을 바라네. (其六) 몸은 비록 건강하여 새지 않지만 이 생명은 멀지않아 끝날 것일새 아름다운 제호(醍醐) 맛도 맛을 잃었고 향기롭던 담복향(薝蔔香)도 향기가 없네! 대소관원(大小官員) 전재(筌宰)들은 여탄(茹歎)하였고 오장육부(五臟六腑) 오려내듯 슬퍼하였다. 여이(黎夷)들도 너나 없이 애통함이여! 부모잃은 아이처럼 통곡하도다. (其七) 슬퍼하는 제자들은 봉둔(蜂屯)과 같고 그 유언에 감동함은 적자(赤子)와 같네! 북수(北首)하고 입적(入寂)하니 세우(細雨) 내리고 남(南)을 향해 비를 세워 표본(標本)을 삼아 바닷물을 막으려는 짧은 지혜(智慧)로 새사람이 나타난들 고인(故人) 당할까? 맑은 덕과 그 웅명(雄名)은 위업(偉業) 보인 것 미래제(未來際)가 다하도록 영원하소서. (其八) 비서성(秘書省) 배융교위(陪戎校尉) 신(臣) 이영보(李英輔)와 대장(大匠)▨ 장자춘(張子春) 등은 왕명을 받들어 비문을 새기다.

【裏面】 고(故) 법천사주(法泉寺主) 지광국사(智光圀師)의 비명음기(碑銘陰記)는 좌(左)와 같다. 현화사주(玄化寺主)이며 승통(僧統)인 소현(韶顯)과 속리사주(俗離寺主)이며 왕자로써 승통(僧統)인 석탱(釋竀)이고, 수좌(首座)는 경현(慶玄)이며, 삼중대사(三重大師)는 석▨(釋▨)이고, 중대사(重大師)는 관운(灌雲)·홍체(弘諦)·점영(占穎)·융보(融保)·숭간(嵩幹)·계상(繼相)·승개(僧鎧)·진소(眞召)·상현(尙賢)·승각(承覺)·동수(同壽)·우상(祐翔)·쌍소(雙炤)·수영(秀穎)·석칭(釋稱)·정신(定神)·각명(覺明)·관승(冠僧)·원약(元)·우현(右賢)·정여(如)·석상(釋翔)·각지(覺支)·상지(尙之)·석운(釋雲)·방란(邦蘭)·보현(甫賢)·석림(釋琳)·증상(證祥)·석인(釋因)·품종(稟宗)·우승(祐承)·진령(眞領)·진감(眞鑑)·세량(世粱) 등 103명이요, 대사(大師)인 현개(賢盖)·충약(忠) 등 17명이며, 대덕(大德)인 정지(定支)·진보(眞保) 등 22명은 가르침을 받아 계승한 자들이다. ▨▨▨ 승록(僧錄)인 선량(先亮)과 중대사(重大師)는 현점(玄占)·혜종(慧宗)·양제(梁濟)·광석(廣碩)·경충(慶忠)·염충(念忠)·심월(心月)·응서(應諝)·민성(敏成)·경조(慶調)·원숭(元崇)·원석(元釋) 등 28명이며, 대사(大師)는 의운(義雲)·석승(釋升)·위호(爲顥) 등 23명이고, 대덕(大悳)인 숭기(崇器)·섬월(暹月)·홍학(弘學)·균선(均善) 등 25명은 직책(職責)에 따라 법계(法階)를 첨가(添加) 받은 자이며, 중직(重職)·혜등(惠燈)·홍범(弘範) 등 1,100여 명은 국사의 도덕을 흠모하여 귀화(歸化)한 자들이요, 수좌(首座)는 석규(釋虬)와 법령(法靈)이며, 삼중대사(三重大師)는 점선(占先)·위현(爲現)·성광(宋光)이요, 중대사(重大師)는 승소(昇炤)·성현(成現)·계언(繼言)·안예(安銳)·도생(道生)·강운(講雲)·이진(利眞)이며, 대사(大師)는 섬현(暹現)·주현(周現)·신창(神暢)·관성(貫成)이고, 대덕(大德) 주란(周蘭)·수기(秀㞯)·단직(單職)·진각(眞)등 52명은 국사를 전후하여 입적(入寂)한 자들이다. 우건(右件) 문도(門徒)의 개좌(開座)와 직명(職名)을 새겨서 후세에 전하도록 한다. 승봉랑(承奉郞) 상서도관랑중(尙書都官郞中)이며 비어대(緋魚袋)를 하사받은 안민후(安民厚)는 글씨를 쓰고 대안원년(大安元年) 세재(歲在) 을축년(乙丑年) 중추월(中秋月)일(日)에 세웠으며, 신(臣) 이영보(李英輔)와 신(臣) 장자춘(張子春) 등은 글자를 새기다.

판독문

  • 출처: 허흥식, 『한국금석전문』중세상편, 아세아문화사, 1984. [2]

	 	
 	贈諡智光國師玄妙之塔碑銘(題額)」
高麗國原州法泉寺講眞弘道明了頓悟戒正高妙應覺探玄道源通濟淵奧法棟具行了性䆃首融炤朗徹贈諡智光國師玄妙之塔碑銘幷叙」
      中大夫門下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判尙書禮刑部事監脩 圀」
      史兼 太子太傅上柱 國臣鄭惟産奉  宣撰」
      承奉郎尙書都官郎中賜緋魚袋臣安民厚奉    宣書幷篆額」
臣聞 瞿曇弥敷演妙音瓦三摩地蘇槃度製成高論窮八識源斡開相應之眞宗寖廣顯揚之正敎斯所以誡我人於筏喩旌主宰與軌持雖至理本乎虛玄等無差別而諸根由乎利鈍悟有淺深然汲引於」
愚迷則指陳其權實曁乎去 佛滋遠遺文漸隳有如玄奬之儔念念相續探彼脩羅之窟拳拳服膺崇信寶乘競騰鋒辯襲晋翻而覩奧並振頽㳂隋譯以鉤深俱維絶紐東流之法法非異內向者心心自」
通玆故間出魁雄踵爲胤播威名於賢刧硏戒定於梵題效 慈氏之分身降毗梁帝軼 文殊之現跡來應穆王普化仁▨丕弘象正顒祈 聖祚助致鴻均者唯 我國師而已哉 師諱海麟字巨龍俗」
姓元氏幼名水夢原州人也惟高唯曾積善積慶覈犧易安貞之繇用晦而明遵彦升儉約之風不劊其朴祖諱吉肩心卜筮首事陰陽著象何虞觀變而仰膺乹顧鑽龜得兆决疑而無俾世迷父諱休軄簉衙」
官譽先椽吏思得床喤之嗣愛聞椒衍之詩母李氏利契提壼恭踰擧桉無邊善願宛然光目婦人最勝姝容知是妙顔聖▨甞夢河海澄瀲井泉涌㳅因以有娠甚於呑氣履拇之跡那羨於姜嫄託胎之期置」
符於王邵旣彌厥月爰發其祥以雍熈元年歲在閼逢涒灘涂月晦日誕  師於私第歟故童年號爲水夢也昔明王卽位二十四年江河泉池忽然汎漲是 佛生之瑞比於 吾師資始之徵一無異焉 師」
曰蔗分精淤蓮禀性銳意於斷除愛非心乎資益色身甫及齠秊勤恁幼學謁李守謙請業謙見異之曰余則不知碩量爾宜務擇明師矣或有一老嫗善相者見文在手謂 師曰伱若爲僧必貴於世 師」
洎聞達筭抵事道籌不觀孔孟之方尙鄙老㽵之槩錙銖軒冕糠秕膏梁遽就法皐寺大師寬雄處斅學之次雄公適指京華俄辝水石彼則浮杯以渡纔出五雲 我則負笈而追匪遙千里同歸輦下卽占山」
西旋接于海安寺俊光方丈剃毁容出家修道展縟儀於函杖款窮縹帙於貫花魏蒼舒秤象之年解傳眞諦迦衛國駝烏之類僉讓金公其於檢括機緣迺▨激揚宗要一聞千悟功倍於嚴師兩智三明」
道存於紹 佛雄公悅而名之海潾以統和十七年首夏之月禀具於龍興寺之官壇洗心離染如手畵空矣時年二九例被崇敎寺開刱之恩初職爲得名也仍赴慈雲寺唱薩之場焚修向畢雄公於法泉寺」
安寢之頃間夢見一鷹飛到則伸左拳以捧之又兩山君來入於後園互相踊躍徹明而去雄公異而誌之翊日 師朅來本寺此其應也 師夢到海濱手捉小魚呑之覺而解之曰魚則鱗也因以鱗爲名巨」
龍爲字矣春秋二十一赴王輪寺大選談經而言近意深命侶而問同答異彼觖望者如盲之執燭或醜爭者止語於銜枚心息諸緣敢歎波濤之依水法離羣動應嗤槖籥之假風解議圍而憍梵疊降峩忍鎧
兮尼軋轍亂捉塵而一趍誠可折床之衆許明揚仍署大德于時 師以謂曰紛吾慙後於義龍瑞 聖奠先於仁獸故 以麟改鱗爲名也統和年中受法號曰講眞弘道二十八年大師將還法皐寺路値寒」
講眞肇偕行次聞肇公念曆算之法 師請傳之取則而易於反掌移謀而明若發矇賈餘勇於恒流究多能於鄙事者矣屬統末考我聖孝顯宗御宇第五年也特蒙 睿奬加▨▨▨太中祥符十▨▨▨」
號爲明了頓悟天禧五年於鎬京重興寺爲夏講說師談傾法澤伻火宅以晨凉炤徹慈燈底昏衢之夜曉竺▨西意 師每一稱箕子古都衆皆三讃其後見耆宿先公社會詞䟽文理不便改而製之小▨▨」
道翦截浮辭出語成章惠璩以之魄褫分文足韻曇憑于以顔怩其遒姸敏捷之能侯誰的對乎太平年中加重大師戒正高妙應覺爲號住持水多寺十秊有 勑移住海安寺迄于 悳宗臨朝轉甚重之特」
授三重大師幷賜磨衲法服一領加法稱曰探玄道源未幾加 授首座兼 賜磨衲田衣一笥者▨▨▨滋深寧許井蛙之測緇流翩賀却輕廈燕之投疑出世之 覺王幸同時於 仁主盖海之聲無央數」
懸河之辯不盡言重熈秊中加號曰通濟淵奧法棟忽一旦 宣許入內俾演蓮經 師螭陛躡雲貌床講兩標眞顯正牛車之奧旨箕張剪惑裁疑龜木之妙詮玉振曁諧黈聽奚惓 珎頒別 賜細繡幢」
相服二領十四年擢 授僧統迨于 今聖上育夏臨民 甄殷布政洪業巳臻於懿鑠瀹誠深切於那摩迺 召師於琳宮講唯心妙義仍 賜磨衲僧伽一領 漢闕九重丁負扆者親迎象步慧徒十百」
升堂者謂透龍門邃公慙在北之精通僧徹讓流中之寵錫其年中荐加具行了性䆃首爲号且或祇園釋胤寔惟敎所由興戚里神童疇不禮䎹來學是以故守大師門下侍中追贈中書令章和公李諱子淵」
遂許第五男遄令落竚望摳衣爲神足以服勤謁 法身而鑽仰何者今金山寺住持三重大師韶顯是也大師辭親甲第節食卯齋想椒掖之后妃悉云同氣矧萼樓之兄弟皆謂此乃如之人以其道」
併通儒釋頓絶等倫德行文章夐掩魯堂十哲慈悲智惠全超魏寺千僧資峻玄班力扶赫世其壯麗 師門之盛莫之與京乎重熈二十三年南呂月有 聖勑移住玄化寺師固辭不得迺捨馬一疋先」
納于寺俄有一比丘來申賀謝須臾不知所去此則聖僧之靈驗也入院後夜分魂栩之際與一僧同遊則傍有神人告曰而 國師也彼 王師也窹則言猶在耳嘉兆首稱於瑞錄吉音漏溢於環區矣况」
國師也何偏局乎內宗亦兼贏乎外典生知衆妙夙齡欺朱勃才童强識群書時譽冠惠超學士至若詞峯倚日筆塚擎天若警句之愈工被鉅孺之寡和湯開士碧雲雅作豈是壤奇李謫仙白雪淸吟誠爲瑣」
劣較於緇素之侶亦不可同年而語矣其或期憑梵福益盛 宸圖傾檀施之財藏工依之價爰徵愷筆繪出  睟容或鑄鳧鍾兼成茫具新營 寶剝移覩吏之天宮敬造金言悉拘那之海藏斯所謂始擅」
乎發弘誓願終圓乎締大因緣其諸善奉行之釆豈可彈籌乎淸寧二年十月日 上謂之曰鵬耆則非法無以救迷 聖則非師無以請益苟能悟法者可以爲師乎特降 國王諮請遂措遣工部侍郞張」
仲英尙書左丞柳紳禮部侍郞金良贄等備行三反之禮續遣知中樞院事異惟忠押賜錦法服銀黃器用香荈等 師膠讓不獲 命卽以十一月四日 大駕行幸于內帝釋院備禮 拜爲 王師彼」
其周之同載吳之同輦者共在下風矣三秊 進法稱曰融炤四年五月初一日 上欲爲  師致書三請以是月十九日備 金駕親幸奉恩寺封 我師爲 國師封靈通寺主僧爛圓爲 王者」
涓辰並 授於丕稱兩相合矣同日秪承於 摯寵二美顯焉觀其所由歎未曾有嚮所夢神人之吉語必䜟此矣同遊之僧靈通寺主是也五秊陽月八日 師赴內殿爲百座會第一說主才宣半偈荐集丕」
休累 進法稱曰朗徹咸雍三年二月日 師欲歸安于法泉寺幾興暮齒之嗟縷陳身退三上需頭之奏確執懇辭 上優詔從之以九月二十二日 駕幸玄化寺特設闔院僧齋兼置寅餞之筵訖 率▨」
班拜辭後則遣左承宣中書舍人鄭惟産押上茶藥珤貨等名數夥多刪煩不載 取是月二十七日發行指本山 上命太子率諸王百僚於南郊餞別特差道俗員寮等慰送于本寺芒 師下山後三▨」
仲夏之月 聖上以延德宮第六王子許令剃捿息于玄化寺舊住奉天院特授首座者斯緣類肖 國師之邊幅也是歲十月二十三日晏陰右臥而寢此夜零雨其濛師窹而跌坐謂弟子曰兒▨▨▨」
答曰雨也聞言則示化矣昔鶖子入滅無色諸天所泣之淚如春細雨今之夜雨豈非諸天之淚乎嗚呼哀哉報年八十七僧臘七十二卽世前夜有二星見其大如燈又有大虹二條如亦龍之雙臥此▨▨▨」
示滅之兆也門▨首座法靈三重大師韶顯等擗踊訃䎹於 彤陛 上則震悼尋遣左街僧錄崇演保章正全叄藺等監護葬事續差遣專不任彼殯堂致其卓祭 贈諡曰 智光併 賜茶香油燭及原州」
倉穀以充拔薦之費十一月九日選勝于法皐寺之山東茶毗禮也是時人祗憯慟天地晦冥鳥獸悲鳴峯巒慘列有情無情皆感 德之終乎 上追嘉軌範敢弗標題欲使刋黃絹之辭樹貞珉而不朽煥」
赤髭之躅流歷代以長存爰 命鯫儒俾甄鴻烈臣牛涔挍量兎海寡能謬奉 綸宣罔由綦讓挹其 風而紀其 德雖堅匪石之心膚於學而拙於才自愧無錢之手輒狂裴但聲奉培謹爲銘曰」
妙法奚自 能仁所宣西軋首出東震臚傳諦分眞俗理應機緣䆃迷歸正憑實假權(其一)大敎旣周群生胥悅惠日流光岸谷皆徹慈雲灑潤蒿蘭不別去 聖逾遙遺風欲絶(其二)其誰紹者唯 我尸之誕鍾芊」
氣端遌 明時辭親割愛捨素從緇釋林蕚鳳囿蓍龜(其三)懇發菩提口修般若內究空宗外工儒雅品匪地前譽魁天下福智相嚴比倫盖寡(其四)戒賢再出無着重生德瓶恒滿心鑑轉明桑門鍊行 蘂闥馳
聲 瑤皇請益寶世飛榮(其五)爲 萬乘師合諸天道普祐邦家永堅懷抱崢歲阽危圜封告老廬阜于歸  高年是禱(其六)身雖不漏命也云亡醍醐輟味薝蔔歇香 筌宰茹歎暗斷胏膓棃夷慟如喪爺孃(其七)
吁哲弟之蜂屯感遺言而慕甄北沒之先芬勒南刋而後諭儻海塞以河湮或人新而代故庶 淑德與雄名亘將來而有裕(其八)」
       秘書省陪戎校尉臣李英輔大匠臣張子春等奉 宣刻字
  (陰記)
 故法泉寺主智光 圀師碑銘陰記如左
玄化寺主僧統韶顯俗離寺主 王子僧統釋竀首座慶玄三重大師釋▨重
大師灌雲弘諦占頴融保嵩幹繼相僧鎧眞占尙賢承覺同壽祐翔雙炤秀頴」
釋稱定神覺明冠僧元右賢靗如釋翔覺支尙之釋雲邦蘭甫賢釋淋證詳
釋因禀宗祐承眞領塡鑑世梁等一百三人大師賢盖忠等一十七人大德」
定支眞保等二十二人受敎繼業者也石▨▨僧錄先亮重大師玄占慧宗梁
濟廣碩慶忠念忠心月應諝敏成慶調元崇元釋等二十八人大師義雲釋升」
爲顥等二十三人大悳崇器暹月弘學均善等二十五人隨職加階者也重職
惠燈弘範等一千一百餘人慕德歸化者也首座釋虬法靈三重大師占先爲」
現宋光重大師昇炤成現繼言安銃道生講雲利眞大師暹現周現神暢貫成」
大德周蘭秀單軄眞等五十二人先後 師而沒世者也」
右件門 開座職名彫錄施行」
      承奉郎尙書都官郎中 賜緋魚袋臣安民厚」
 大安元年歲在乙丑仲秋月 日樹 臣李英輔臣張子春」

주석

  1. 온라인 참조: " 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비(法泉寺智光國師玄妙塔碑)",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원.
  2. 온라인 참조: "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비(法泉寺智光國師玄妙塔碑)",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