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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거(廉居, 廉巨) | |
대표명칭 | 염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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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Yeomgeo |
한자 | 廉居, 廉巨 |
생몰년 | ?-844(신라 문성왕6) |
승탑 | 전 원주 흥법사지 염거화상탑 |
정의
신라 말기의 승려.
내용
도의(道義)의 제자로,[1] 가지산파(迦智山派)의 2대 조사(祖師)이다.[2]
도의가 처음 신라에 남종선(南宗禪)을 전래하였을 당시 사람들은 교학(敎學)만을 숭상하고 무위법(無爲法)을 믿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3] 염거 역시 선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었던 시대에 오직 일념무주(一念無住)만을 의지하고 지내다가, 체징(體澄)에게 법맥을 전하여 가지산파를 대성시킬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뒤 입적하였다.[4]
도의-염거-체징으로 법맥이 이어지는 과정은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長興 寶林寺 普照禪師塔碑)의 비문에 기록되어 있다.
25px | 처음 도의선사가 서당(西堂: 지장선사(智藏禪師)를 가리킴.)에게서 심인(心印)을 전수받고 후일 우리나라에 돌아와 그 선(禪)의 이치를 가르쳤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경의 가르침과 관법을 익혀 정신을 보존하는 법만을 숭상하여 무위임운(無爲任運)의 종(宗)에 모이지 아니하고 허탄한 것으로 여겨 높이어 중히 여기지 않았으니, 마치 달마조사가 양 무제를 만났음에도 뜻이 통하지 못한 것과 같았다. 이로 말미암아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함을 알고 산림에 은거하여 법을 염거선사(廉居禪師)에게 부촉했다. 이에 염거선사가 설산(雪山: 지금의 설악산) 억성사(億聖寺)에 머물면서 조사의 마음을 전하고 스승의 가르침을 여니, 체징선사가 가서 그를 섬겼다. 선사가 맑게 일심을 닦고 삼계(三界)에서 벗어나기를 구하여 목숨을 자기의 목숨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몸을 자기의 몸으로 여기지 않았다. 염거선사가 그 뜻과 기개에 짝할 만한 이가 없고 그 타고난 바탕이 범상치 않음을 알아, 현주(玄珠)를 부촉하고 법인(法印)을 전해 주었다. | 25px |
출처: 이지관,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 창성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신라편,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106-107쪽. |
이후 염거는 842년(문성왕 4) 지금의 평택에 위치한 약사사(藥師寺)를 창건하였다.[5]
844년(문성왕 6)에 조성된 전 흥법사 염거화상탑(傳興法寺廉居和尙塔, 국보 제104호)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부도(浮屠)로 추정되고 있다.[6]
갤러리
- BHST Heungbeopsaji Yeomgeo stupa.jpg
- BHST Borimsa Doui.jpg
장흥 보림사 조사전 내 도의 진영
- BHST Borimsa Chejing.jpg
장흥 보림사 조사전 내 체징 진영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전 원주 흥법사지 염거화상탑 | 염거 | A는 B를 위한 승탑이다 | |
도의 | 염거 | A는 B의 스승이다 | |
염거 | 체징 | A는 B의 스승이다 | |
도의 | 가지산문 | A는 B를 개창하였다 | |
염거 | 평택 약사사 | A는 B를 창건하였다 | |
염거 |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 | A는 B에 기록되었다 |
주석
- ↑ 곽철환, 『시공 불교사전』, 시공사, 2003. 온라인 참조: "염거", 용어해설,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염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3년 05월 14일. - ↑ "도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염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3년 05월 14일. - ↑ "약사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부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전)원주 흥법사지 염거화상탑", 문화재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