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의 두 판 사이의 차이

DHLab
이동: 둘러보기, 검색
(전면)
 
잔글 (판 1개를 가져왔습니다)
 
(차이 없음)

2017년 6월 15일 (목) 12:22 기준 최신판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
(驪州 神勒寺 普濟尊者石鐘碑)
대표명칭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
영문명칭 Stele for Buddhist Monk Boje at Silleuksa Temple, Yeoju
한자 驪州 神勒寺 普濟尊者石鐘碑
주소 경기도 여주시 신륵사길 73(천송동)
문화재 지정번호 보물 제229호
문화재 지정일 1963년 1월 21일
찬자 이색(李穡)
서자 한수(韓脩)
각자 이인중(李仁衆)
서체 해서(楷書)
승려 나옹(懶翁)
건립연대 1379년
비문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문



정의

경기도 여주시 천송동 신륵사에 있는 고려말의 승려 보제존자 나옹(普濟尊者 懶翁, 1320-1376)의 탑비.

내용

개요

전체높이 212cm, 비신높이 121cm, 너비 61cm. 보제존자석종비는 3단의 직사각형 대석(臺石) 위에 비좌(碑座)를 놓은 후 비신(碑身)과 옥개석(屋蓋石)으로 구성했다. 비좌는 2단으로 하대에는 구름무늬를, 그 위로는 앞뒤 5엽의 연꽃무늬를 조각하였다. 비신은 대리석으로 양옆에 화강암기둥을 세워 보강하였다. 그 위에 옥개석에는 목조건물의 공포와 기왓골을 조각하였다. 신라시대 이래로 귀부와 이수를 갖춘 일반화된 석비형식이 고려 말기에는 대석과 옥개석으로 변형되기 시작하는데, 바로 이 비가 고려 말기의 석비형식을 잘 보여준다.[1][2]

탑비의 찬자는 이색(李穡), 서자는 한수(韓脩)이며 각자는 이인중(李仁衆)이다. 나옹의 비는 입적한 이듬해에 같은 지은이가 상세하게 쓴 양주 회암사지 선각왕사비(楊州 檜巖寺址 禪覺王師碑)도 있고 영전사(靈田寺) 탑지로 추정되는 간단한 탑지도 있어 비문 자료가 다수이다. 1963년 보물 제 229호로 지정되었다.

비문

전면

비문의 내용은 사리석종기(舍利石鐘記)와 진당시(眞堂詩)의 두가지 내용으로 되어있다. 사리석종기에는 일반적으로 비문에서 승려의 생애를 기술하는 것과는 달리 신륵사에 이 석종을 안치하고 그 기문(記文)을 짓게 된 연유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 나옹의 입적 후 제자들이 진영당을 짓고 석종을 만들어 사리를 봉안하였으며 비문을 신륵사와 연관 있는 염제신(廉悌臣)을 통해 이색에게 부탁하여 짓게 되었음을 기술하였다. 진당시는 제자 지선(志先)이색에게 부탁하여 사리를 봉안한 신륵사에 후대 사람들이 탑에만 예경하고 왕사의 모습을 알지 못할까 염려하여 영정을 봉안하고 그 기록을 구하기에 진당시를 지었음을 기술하였다.[3]

후면

음기에는 문하제자를 승계에 따라 열거하고 당대의 관(官)과 부인들이 대거 등장하는 재가신도(在家神道) 명단을 실었다. 환암(幻庵), 혼수(混修), 고암, 일승(一乘), 무학(無學), 자초(自超) 등 당대 고승을 망라하였고 재가신도로는 염제신(廉悌臣), 이인임(李仁任), 최영(崔瑩), 이득분(李得芬) 등 당대 권신들이 모두 동참하고 있다.[4]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 나옹 A는 B를 위한 비이다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 이색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 한수 A는 B가 비문을 썼다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 이인중 A는 B가 비문을 새겼다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 양주 회암사지 선각왕사비 A는 B와 관련있다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1.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 『문화재검색』online, 문화재청.
  2. 정병삼, 홍대한, 『신륵사』, 대한불교진흥원, 2011, 169쪽.
  3. "신륵사보제존자석종비", 금석문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원.
  4. "성보문화재 소개", 『천년고찰 신륵사』online.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