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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15일 (목) 11:56 기준 최신판
풍양조씨 자기록 | |
한자명칭 | 豊壤趙氏自記錄 |
---|---|
영문명칭 | An autobiography of Madame Jo of Pungyang |
작자 | 풍양조씨 |
간행시기 | 1792년 |
소장처 | 국립중앙도서관 |
유형 | 고서 |
크기(세로×가로) | 33.7×23.9㎝ |
판본 | 필사본 |
수량 | 1책 |
표기문자 | 한글 |
목차
정의
김기화(金基和)의 처 풍양조씨(豊壤趙氏, 1772~1815)가 쓴 회고록이다.
내용
장서각 한글특별전 내용
김기화(金基和)의 처 풍양조씨(豊壤趙氏, 1772~1815)가 쓴 회고록이다. 『자기록』의 구성은 저술 동기를 밝힌 서문으로 시작하여 아버지의 효성과 인품에 관련된 일화, 어머니의 인품과 관련된 내용을 서술하였다. 이어서 남편 김기화와 결혼한 이후에 시부모를 봉양하던 시절과 남편이 병에 걸려 투병한 생활을 곡진하게 적고 있다. 『자기록』의 저술 시기는 “임ᄌᆞ계츈의 풍양후인은 혈읍작셔ᄒᆞ노라”라는 필사기를 통해 1792년에 저술한 것으로 보이며, 이후에 후반부 10장은 제문(祭文)과 저자의 술회 등을 추가한 것으로 보인다. 『자기록』은 사실적인 표현으로 풍양조씨의 생애를 기록했는데, 이를 통해 당대 사회의 분위기와 여성의 삶을 엿볼 수 있다. [1]
풍양조씨(김기화의 처)와 집안배경
풍양조씨(김기화의 처)는 조감과 하명상의 딸 사이에서 둘째딸로 태어났다.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15살에 청풍김씨 집안의 김기화에게 시집을 갔으나 20살에 남편을 잃고 20년을 청상과부로 살았다. 풍양조씨(김기화의 처)의 친정은 풍양조씨의 서계(庶系:서자자손의 계통)이었으나 할아버지 조상수와 아버지 조감이 풍양조씨 세도정치의 중심에 있던 조상경, 조엄의 귀양길을 따라다니는 등 계속해서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을 보인다. 덕분에 조상수와 그 아들 조철은 음서로 관직에 진출했다. 풍양조씨(김기화의 처)의 아버지 조감은 32살에 무과에 급제했다. 풍양조씨의 외가는 풍양조씨의 외할아버지인 하명상 대에 문호가 크게 신장됬다. 하명상의 아버지 하한명은 향리로 은거하며 재산을 모았고, 하명상은 5번이나 개명하면서 여러차례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한다. 결국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간다. 5번이나 개명한 것으로 보아 풍양조씨(김기화의 처)의 외가가 미신적인 경향을 지녔음을 알 수 있는데, 『풍양조씨 자기록』에서도 '본래 집이 … 점복을 몹시 좋아한 까닭에"라고 쓰여있음을 보아 풍양조씨(김기화의 처) 본인도 외가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풍양조씨(김기화의 처)의 남편 김기화의 집안은 김우명의 적계(嫡系:친자 자손의 계통으로 첩의 후손(서얼)이 아닌 경우를 의미)후손이었다. 김기화의 할아버지 대부터 관직에 나아가지 못했다. 그래서 온 집안이 김기화의 과거급제를 기다리지만 일찍 죽고 만다. 김기화의 집안이 풍양조씨(김기화의 처)의 집안에 비해 경제적으로는 열세였지만 현종의 장인인 김우명의 적계후손으로 신분면에서는 우월했다. 또 김기화의 증조할아버지와 김기화의 양자 김최선이 무과에 급제하였다. 즉 풍양조씨(김기화의 처)의 친정, 외가, 시댁 모두 무과에 급제한 집안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2]
풍양조씨 자기록의 내용와 특징
내용을 살펴보면 풍양조씨(김기화의 처)의 친정이 풍양조씨의 시댁(청풍김씨)가문을 많이 도와줬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작가 풍양조씨의 친정에 대한 자부심과 정서적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또 시모에 대한 서술이 눈에 띈다. 시모가 시집온 초기에 자신의 울적함을 달래기 위해 남편과 본인에게 '유희'를 권했다는 것이다. 부모의 앞에서 어린아이의 모습을 지으면서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 유교에서 전형적인 표행의 방식이나 풍양조씨 본인은 그것이 낯설었다고 하고 있다. 또한 시모가 아들을 붙잡아 절에 과거공부를 하러가지 못했던 경우도 있었다. 그래도 남편은 다정했던 것으로 보이나 애교 많은 분위기의 시부모가 보기에 둘의 사이는 무미건조했던 듯 하다. 풍양조씨(김기화의 처)는 진지한 대화가 오가는 부부 관계가 어린아이 흉내나 내는 모자 관계보다 진정어린 관계임을 표현하고 있다. 남편이 병에 걸렸을때 시부모가 '밥만 잘먹으면 된다'고 주장하자 몰래 친정에 약을 부탁했다는 내용이 있다. '흰밥 미육귝을 국보'로 안다는 표현에서 시댁의 지나친 검약에 대한 반발과 비합리적인 처사에 대한 원망의 태도를 보여준다. 이렇게 시댁 어른들과의 가치관 차이에서 비롯되는 불만과 불신을 표시하며 자신의 가치관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풍양조씨(김기화의 처)의 부친 조감은 모친이나 언니보다 상대적으로 거리가 멀었으나 시집간 후에는 시부모와 대조되는, 풍양조씨(김기화의 처)의 보호자이자 조력자로 묘사된다. 또 언니는 시집을 간 후에는 그 심리적 거리가 형식적으로 멀어진다. 이들은 남편 사후 누구보다 '풍양조씨(김기화의 처)'를 우선시하는 보호자로 부각된다. 남편이 죽고난 뒤에는 시부의 재취(장가) 가능성을 언급하며 시모와 본인이 협력관계에 있어야 함을 말한다. 이렇게 풍양조씨(김기화의 처)는 일상속의 관계를 민감하게 포착하고 있다. 결국 『풍양조씨 자기록』에서 풍양조씨(김기화의 처)의 삶의 중심은 '친정'가문이었던 듯하다. 남편의 죽음이라는 큰 사건 속에서도 자결하지 않고, '투생(偸生:삶을 훔치다)'이라는 결정이 가능했던 것은 '부친과 언니'라는 친정가문의 경제적 배경과 그들이 풍양조씨(김기화의 처)가 자신의 삶을 선택해야 한다는 결정을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풍양조씨 자기록』은 남편을 잃은 뒤 그를 따라 자결하지 않고 삶을 선택한 여성의 죄의식의 기록이라기 보다는 남편의 병을 키우고 결국 죽게 만든 시댁의 비합리성을 드러내는 기록이다.[3]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김기화의 처 | 풍양조씨 자기록 | A는 B를 저술하였다 | 1792년 |
김기화의 처 | 김기화 | A는 B의 아내이다 | |
김기화의 처 | 풍양조씨 | A는 B에 소속된다 | |
김기화 | 풍양조씨 자기록 | A는 B에 언급되었다 | |
조감 | 김기화의 처 | A는 B의 어버이다 | |
조감 | 풍양조씨 자기록 | A는 B에 언급되었다 | |
조철 | 조감 | A는 B의 형제이다 | |
조상수 | 조감 | A는 B의 어버이다 | |
김우명 | 김기화 | A는 B의 조상이다 | |
김우명 | 명성왕후 | A는 B의 어버이다 | |
명성왕후 | 현종 | A는 B의 아내이다 | |
김기화 | 김최선 | A는 B의 양부이다 | |
김최선 | 풍양조씨 자기록 | A는 B에 언급되었다 | |
하한명 | 하명상 | A는 B의 어버이다 | |
하명상 | 김기화의 처 | A는 B의 조상이다 | |
국립중앙도서관 | 풍양조씨 자기록 | A는 B를 소장하였다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
1792년 | 풍양조씨가 풍양조씨 자기록을 저술하였다. |
공간정보
위도 | 경도 | 내용 |
---|---|---|
37.497765 | 127.003674 | 국립중앙도서관이 풍양조씨 자기록을 소장하였다 |
시각자료
사진
- 한글팀 풍양조씨 자기록02 풍양조씨 자기록02.jpg
주석
-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06.28, 138쪽.
- ↑ 김경미, 「《자기록》의 저자 '풍양조씨' 연구」, 『한국고전여성문학연구』28, 한국고전여성문학회, 2014, 125-136쪽.
- ↑ 홍인숙, 「《자기록》에 나타난 일상적 생애 서술의 특징과 효과」,『고전여성문학연구』 25, 한국고전여성문학회, 2012., 249-269쪽.
참고문헌
더 읽을거리
- 단행본
- 김경미, 『자기록(여자, 글로 말하다)』, 나의 시간, 2014.
- 박무영, 『조선의 여성들, 부자유한 시대에 너무나 비범했던』, 돌베개,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