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당"의 두 판 사이의 차이
잔글 (판 1개를 가져왔습니다) |
|
(차이 없음)
|
2017년 6월 15일 (목) 12:13 기준 최신판
이지당 | |
---|---|
380px | |
공간 | |
한자명 | 二止堂 |
유형 | 건축물 |
성격 | |
건립시기 | |
규모 | |
소재지 | |
문화재 지정번호 | |
문화재 지정날짜 | |
이미지 출처 |
목차
개요
이지당(二止堂)은 조헌 선생이 지방의 인재들을 모아 강론하던 서당이다.
초기 각신동(覺新洞)이라는 마을 앞에 위치하여 '각신서당(覺新書堂)'이라 불렀는데, 나중에 송시열이 조헌 선생을 기리고자 하는 의미에서 이지당이라 이름을 바꾸었다.
위치
- 충청북도 옥천군 군북면 이백리에 위치해 있다.
3D 파노라마 가상현실
- 현재 제작된 가상현실 자료가 없어 진주유씨 모산종택 가상현실 자료로 대체
역사적 의미
조헌의 강학공간
- 이지당은 본래 조선시대 중엽 옥천읍 옥각리에 사는 금(金), 이(李), 조(趙), 안(安)의 4문중이 합작해서 세운 서당이다. 본래는 각신동(覺新洞)이라는 마을 앞에 있었기 때문에 서당의 이름을 '각신서당(覺新書堂)'이라고 하였다. 조헌이 이곳에 터를 잡고 후학을 가르치면서 직접 친필로 현판을 썼으니, 현재도 조헌이 쓴‘각신서당’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 조선 후기 김천택이 편찬한 시조집 청구영언(靑丘永言)에는 조헌의 시조 한 편이 전해진다. "지당(池塘)에 비 뿌리고 양류(楊柳)에 내 끼인 제 사공은 어디 가고 빈 배만 매였는고 석양에 짝 잃은 갈매기만 오락가락 하더라."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등장하는 이 시조는 봄의 정취와 외로움을 노래한 한 폭의 수묵화와 같은 작품이다. 이 곳 이지당에서 강학을 하며 풍류를 읊었을 조헌의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다.
송시열의 조헌 존숭과 그 의미
초기 '각신서당'이라는 이름은 나중에 송시열(宋時烈)이 시경 소아(小雅) 차할편(車舝篇)에 있는 '고산앙지 경행행지(高山仰止 景行行止)'[1]라는 문구에서 말미의 '지(止)'자를 따서 이지당(二止堂)이라고 고쳐 불렀다고 한다. 이는 송시열이 품었던 조헌에 대한 숭모를 그대로 반영하는 증거라 할 수 있는데, 송시열은 또한 조헌의 묘 이장 당시 묘비를 쓰기도 하였다.
현재의 장소성
이지당은 서화천(소옥천) 너럭바위 앞 낮은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이 지역에서 의병활동을 주도하였던 조헌 선생의 자취로 인해 인근 대청호 오백리길 8구간은 선비길로 여겨진다. 이지당의 외형은 전면을 흐르는 서화천과 묘하게 잘 어우러져 전원의 모습을 아늑하게 품고 있다. 주변 경관을 해치지 않으면서 전원의 한적함을 한껏 피어오르게 만드는 한옥의 미(美)가 뚜렷하다. 지금의 이지당은 광무 5년(1901) 인근의 금(琴)·이(李)·조(趙)·안(安)씨 등 네 문중에서 힘을 모아 정면 7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집으로 중건한 것이다. 목조 기와집으로 정면 일곱 칸 측면 한 칸의 팔작집인데, 가운데 세 칸은 대청이고 서편의 세 칸 중 두 칸은 방이며 한 칸은 부엌이다. 부엌 위로 두 칸의 누각이 있고 동편 한 칸 방 위에도 이층 두 칸의 누각을 만들어 여름에 사용하기 좋도록 했다. 대청에는 '이지당기(二止堂記)'와 '이지당강학조약(二止堂講學條約)'이라 쓴 편액이 걸려 있다.
멀티미디어 자료
*중도일보 "하늘에서 본 옥천 이지당"(2016.09.19)
*금강일보 "대청호오백리길 8구간 - 옥천 이지당"(2015.05.13)
관련정보
인물
문헌
- 이지당의 이름은 시경의 내용과 관련이 있다.
각주
- ↑ 고산앙지 경행행지(高山仰止 景行行止) : '산이 높으면 우러러 보지 않을 수 없고 큰 행실은 그칠 수 없다'라는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