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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15일 (목) 11:57 기준 최신판

대표명칭 집현전
한자명칭 集賢殿
창립자 인종
창립시대 고려 인종
변경일 1420년 (세종 2)
해체일 1456년 (세조 2) 홍문관 설치
설립목적 유교주의적 의례 및 제도 확립
담당업무 도서의 수장 및 이용의 기능, 학문활동의 기능, 국왕의 자문에 대비 등
소재지 서울시 종로구 세종로
웹사이트 http://www.royalpalace.go.kr:8080/




정의

조선 전기 학문 연구를 위해 궁중에 설치한 기관. [1]

내용

집현전 제도는 중국에서 연원한 것으로서 한(漢)나라 이래 있어 왔다. 그러나 제도가 정비된 시기는 당나라 현종 때로서, 학사(學士)를 두고 시강(侍講 : 강의)·장서(藏書 : 책의 보관)·사서(寫書)·수서(修書)·지제고(知制誥 : 왕의 교서 등을 지음) 등을 담당하게 하였다. 우리 나라에도 오래 전에 이 제도가 도입되어 이미 삼국시대에 유사한 제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집현전이라는 명칭이 처음 사용된 것은 고려 인종 때이다. 연영전(延英殿)을 집현전으로 개칭하고 대학사(大學士)·학사(學士)를 두어 시강 기관(侍講機關)으로 삼았지만, 충렬왕 이후 유명무실한 기관이 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정종 때 집현전이 설치되었으나, 얼마 뒤 보문각(寶文閣)으로 개칭했고, 이것마저 곧 유명무실해졌다. 그러나 건국 이래로 표방해온 유교주의 국가로서 갖추어야 할 유교주의적 의례·제도의 확립은 오랜 기간을 필요로 하는 과제였고, 대명사대관계(對明事大關係) 또한 어려운 과제였다. 그러므로 두 과제를 원만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이를 감당할 수 있는 인재의 양성과 문풍(文風)의 진작이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1420년(세종 2) 집현전을 궁궐 안에 설치하게 되었다.

집현전은 설치 동기가 학자의 양성과 문풍의 진작에 있었고, 세종도 그와 같은 원칙으로 육성했기에 학구적인 특성을 띠고 있었다. 그러므로 세종대에는 일단 집현전 학사에 임명되면 다른 관직으로 옮기지 않고 그 안에서 차례로 승진해 직제학 또는 부제학에까지 이르렀고, 그 뒤에 육조나 승정원 등으로 진출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처럼 오랜 기간 동안의 연구직인 학사들의 연구에 편의를 주기 위해 많은 도서를 구입하거나 인쇄해 집현전에 모아 보관하는 한편, 휴가를 주어 산사(山寺)에서 마음대로 독서하고 연구하게 하였다. 그 밖에 여러가지 특권을 주어 불편하거나 부족함이 없도록 하였다. 그 결과 우수한 학자들이 집현전을 통해 많이 배출되었다. 집현전은 학문 연구 기관으로서 제도적으로는 도서의 수장(收藏: 수집과 보관)과 이용의 기능, 학문 활동의 기능, 국왕의 자문에 대비하는 기능 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집현전의 기능과 성격은 37년이라는 짧은 존속 기간에도 불구하고 단계적인 변화를 보이며, 대체로 3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제1기[1420년(세종 2)∼1427년(세종 9)]는 활발한 활동은 없었으나, 전시기를 이끌어나갈 대부분의 기능이 마련되었고, 학문적 수련을 쌓아 자기 충실을 기한 시기였다.

제2기[1428년(세종 10)∼1436년(세종 18)]는 집현전의 정원이 16인에서 32인까지 증가되었다. 기능 또한 확대되어 유교주의적 의례·제도·문화의 정리 사업이라 할 수 있는 고제 연구(古制硏究)와 편찬 사업을 시작해 가장 활기찬 시기였다.

제3기[1437년(세종 19)∼1455년(세조 2)]는 집현전의 정원이 20명으로 축소 조정되고, 집현전의 정치상의 지위 상승으로 점차 정치성을 띠는 전환기였다. 문종이 즉위하면서부터는 집현전 학사의 대간(臺諫)으로의 출입이 잦아져서 집현전이 대간 차출의 본거가 되어 호간고론(好諫高論 : 바른 말을 좋아하고 높은 수준의 논의를 함)적인 집단으로 변하였다. 즉, 집현전의 학문적인 성격에 질적인 변화가 왔던 것이다. 집현전의 이같은 호간고론화는 세조의 무단(武斷 : 무력으로 억압함)적인 왕권 강화책과 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456년(세조 2) 6월에 일부 집현전 학사와 그 출신자들이 주동이 되어 집현전에 모여서 단종 복위를 도모한 이른바 사육신 사건이 일어나자, 이를 계기로 집현전이 혁파되었고 성종 때 집현전의 후신으로 홍문관(弘文館)이 설치되었다.

집현전은 비록 37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존속한 기관이었지만 역사적 의의는 자못 크다고 할 수 있다. 즉 그 출신들이 세조∼성종대에 현직(顯職)·요직을 차지하면서 집현전 재직 중에 독서와 고제 연구(古制硏究 : 옛 제도를 연구함) 등으로 쌓은 경륜을 현실에 구현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사실상 세조∼성종대에 정치적으로 크게 활약한 자들은 집현전 출신이었고, ≪경국대전≫ 편찬 등과 같은 당시의 제도 확립에 공헌한 학자들도 대부분 집현전 출신이었다. 또한, 많은 유학자들을 배출해 조선 사회의 유교화에 크게 공헌한 것도 집현전이었다.

요컨대 조선 초기, 특히 세조∼성종대에 정치·제도·문화 등의 상부구조를 이끌어간 사람들이 거의 집현전 출신이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2]


시각자료

관련 문서

중심 연결정보 대상
집현전 편찬 의방유취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420년 세종의 집현전 설치

공간정보

공간정보 내용
126.975914/37.578988 집현전

지도


참고문헌

주석

  1. "집현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온라인 서비스에서 인용. 2017년 03월 25일 확인
  2. "집현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온라인 서비스에서 인용. 2017년 03월 25일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