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패(紅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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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문무과 최종 합격자에게 왕의 명의로 발급된 합격증서.

개설

홍패는 글자 자체로는 ‘홍색 문서’라는 뜻이었다. 다른 문서에 비하여 붉은색에 가까운 색을 띠고 있기 때문이었다. 『고려사』를 비롯한 조선초기의 문헌 자료에도 홍패라는 용어가 사용된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로부터 이미 홍패라는 용어가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다만 고려와 조선의 과거제는 차이가 있었고, 고려의 홍패 발급제도는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았으므로 고려의 홍패와 조선의 홍패를 정확히 동일한 정의로 규정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었다. 따라서 조선시대에 한정하여 정의하자면, 홍패는 문무과 고시에 최종적으로 합격한 사람에게 왕명으로 발급된 합격증서라고 할 수 있다.

내용 및 특징

고려는 광종대에 송의 과거제도를 본격적으로 도입하였다. 이후 관료 선발에서 과거의 중요성이 점차 증대되었고, 급제자를 발표하는 방방(放榜) 의식과 더불어 급제자 개개인에게 홍패를 직접 수여해 주는 절차가 정착되었다. 조선에 들어와서 문과와 더불어 무과가 본격적으로 시행되었고, 문무과 급제자 모두에게 홍패를 발급해 주었다. 세종대에 이르러 문무과방방의(文武科放榜儀)가 제도적으로 확립되었고(『세종실록』 16년 3월 7일), 이것은 「오례(五禮)」 가운데 가례의식(嘉禮儀式) 문무과방방의로 정착되었다. 문무과방방의에 문무과 급제자들에게 홍패를 수여하는 절차가 상세히 마련되었다.

조선초에는 잡과(雜科) 합격자에게 발급하는 합격증서도 홍패라고 불렀다(『태종실록』 1년 6월 4일). 그러나 잡과를 문무과와 동등하게 다루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주장이 지속적으로 제기되면서 잡과 합격자에게 발급된 합격증서는 홍패와는 다른 양식의 문서인 백패로 확정되었다(『세종실록』 20년 5월 2일). 결과적으로 성종대에 최종 반포된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 과거 합격증서에 해당되는 문서의 작성 규식은 홍패식·백패식·잡과백패식 세 가지로 확정되었다.

1592년(선조 25)에 발발한 임진왜란 이후 무과 급제자를 대거 선발하면서 기존에는 국가에서 마련해 주던 홍패지(紅牌紙)를 급제자들이 각자 마련하게 하기도 하였다(『광해군일기』 12년 7월 9일). 또한 1627년(인조 5) 정묘호란과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이후에는 당시 청으로부터 화를 당한 인물이나 그 자손에게 발급하는 문서에는 청의 연호를 쓰지 않고 간지(干支)만 써서 발급한 사례도 있었다(『영조실록』 40년 2월 6일)(『정조실록』 24년 4월 10일). 과거에 급제하여 처음으로 홍패를 받은 뒤 60년이 지나도록 생존해 있는 사람에게는 회방홍패(回榜紅牌)가 다시 내려졌다(『정조실록』 18년 11월 10일). 현재까지 남아 있는 홍패 중에서도 이러한 사례가 몇 건 확인되었다.

변천

홍패의 변천 양상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고려시대 홍패를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다행히도 고려말에 발급된 홍패가 현재까지 몇 점 남아 있다. 고려말의 홍패는 조선초의 홍패와는 달리 문서의 첫머리를 왕명준사(王命准賜)로 시작하는 양식의 문서였다. 왕명준사 이하에 ‘○○○가 ○과에 ○등으로 급제하였다.’는 사실을 적고, 발급 연월일과 당시 시험을 관장한 지공거(知貢擧)와 동지공거(同知貢擧)를 기재한 다음 관인(官印)을 찍어 발급하였다.

    1. 00016408_그림1_1376년(우왕 2) 양수생 홍패

고려말의 홍패 양식은 조선에까지 그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고려말과 조선초를 거치면 왕명준사 양식이 아닌 왕지(王旨)와 교지(敎旨) 양식의 홍패가 발급되었다. 왕명준사 양식의 홍패가 관문서였던 것에 반하여 왕지나 교지 양식의 홍패는 왕의 명의로 발급된 왕명문서로서 그 위상이 격상되었다. 그리고 고려말의 홍패에 기재된 지공거와 동지공거에 대한 기재 사항도 조선에 들어와서는 기재하지 않게 되었다.

    1. 00016408_그림2_1401년(태종 1) 노혁 홍패

조선초기는 조선의 과거제도가 정착되어 가는 과정에 있었기 때문에 홍패에 기재된 내용도 과거제도의 변화에 맞추어 변모를 거듭하였다. 처음에는 홍패에 별도로 문과와 무과라는 내용을 구분하여 기재하지 않았다. 과거의 등급 구분인 분등(分等)도 처음에는 을(乙)·병(丙)·동진사(同進士)로 구분되었다가 을·병·정(丁), 갑(甲)·을·병으로 바뀌어 갔다. 그리고 무과의 경우 초기에는 분등을 을·병·동진사로 나누지 않고 일(一)·이(二)·삼등(三等)으로 표기하여 문과와의 차별성이 드러났다. 세종대에 이르러 이러한 차등이 없어지면서 문무과 홍패의 양식이 통일되었다(『세종실록』 18년 5월 25일). 이러한 변화는 조선초기 홍패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었다.

조선초의 제도 변화에 따른 홍패의 변화는 『경국대전』 체제가 성립되면서 비로소 안정화되었다. 홍패는 결국 교지 양식으로 확정되었고, 본문의 표기도 문무과 모두 동일하게 갑·을·병으로 나누어 해당 순위가 기재되었으며, 엄격히 구분하여 사용되었던 ‘급제’와 ‘출신’이라는 용어도 ‘급제 출신’으로 통일되었다. 홍패에 사용된 인장은 조선전기에는 과거지인(科擧之印)이었으나 인조 연간에 과거지보(科擧之寶)로 바뀌었다.

    1. 00016408_그림3_1485년(성종 16) 『경국대전』 홍패식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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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진옥, 『조선시대 생원진사 연구』, 집문당, 1998.
  • 허흥식, 『고려의 과거제도』, 일조각, 2005.
  • 박성호, 「여말선초 홍패, 백패 양식의 변화와 의의」, 『고문서연구』 40, 한국고문서학회, 2012.
  • 박재우, 「고려시대 홍패의 양식과 특징-「장량수홍패」를 중심으로」, 『고문서연구』 37, 한국고문서학회,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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