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화승(香火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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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법당에 향을 올리고 촛불 등을 밝히는 일을 맡은 승려.

개설

향화승(香火僧)은 향화(香火)를 전담하는 승려를 말한다. 향화란 불보살에게 향을 올리고 촛불과 등(燈)을 밝히는 일을 가리키는 말로, 일반적인 예배 행위를 의미한다. 사찰의 모든 전각에는 공통적으로 불상 또는 보살상 앞에 불단(佛壇)이 있는데, 그 앞에는 예불과 의식에 필요한 향로, 촛대, 화병 등을 놓는다. 향화승은 여기에 향과 촛불을 피우고 꽃을 관리하는 일을 맡아보았다. 오늘날에는 지전(知殿) 또는 부전(副殿)이라 부르며, 향과 꽃, 촛불 등을 올리고 조석 예불을 집전한다.

내용 및 특징

『조선왕조실록』에는 향화승에 관한 기록이 네 차례 등장하는데, 모두 원각사(圓覺寺)의 목불(木佛)과 연관되어 있다. 1480년(성종 11) 5월에 원각사의 목불이 돌아앉았다는 소문이 퍼졌다. 소문을 들은 백성들이 절에 가득 모이고 신기한 일이라며 앞을 다투어 시주하였다. 이에 사헌부 등에서는, 절의 주지와 향화승을 추국하여 허황한 이야기를 만들어내 민심을 현혹시킨 죄를 벌할 것을 청하였다(『성종실록』 11년 5월 25일). 사헌부와 사간원을 비롯한 신하들은 이후에도 세 차례 더 국문을 요청했지만, 성종은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성종실록』 11년 5월 28일).

이 사건을 통해 조선전기 사찰의 주요 직책 가운데 향화승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사찰의 직책으로는 주지를 비롯해 향화승, 안거승(安居僧), 화주승(化主僧) 등이 있었다. 안거승은 여름과 겨울에 각각 3개월 동안 한곳에 머물며 수행하는 안거를 시작하거나 마칠 때 개설하는 안거재(安居齋) 또는 안거회(安居會)를 주관하는 자리를 말한다. 화주승은 사찰의 불사(佛事)에 필요한 재원을 모집하는 직책이다. 안거승과 화주승은 상시적인 직책이 아니었으며, 안거 수행을 하거나 시주 모집이 필요할 때 임시로 임명하였다. 이와 달리 주지와 향화승은 상시 직책이었다. 주지는 절의 모든 행정과 일상을 주관했고, 향화승은 전각을 유지 및 관리하고 의식을 집전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변천

조선후기에는 사찰 전체가 통합적으로 운영된 것이 아니라 각각의 전각을 중심으로 개별적으로 운영되었다. 즉 하나의 사찰 안에 대웅전, 관음전, 지장전 등이 있을 경우, 각 전각들은 별도의 전답을 소유하고 개별적으로 운용 재원을 마련하였다. 오늘날에는 주지가 사찰의 행정과 재정 등에 관한 모든 권한을 갖지만, 조선시대에는 전각마다 재정이 분리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향화승도 전각마다 개별적으로 존재할 수 있었다. 다만 모든 사찰에 향화승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일정 규모 이상의 승려를 확보한 큰 사찰에만 있었다. 지금까지 확인되는 사례는 원각사와 나주 쌍계사(雙溪寺), 장흥 천관사(天冠寺) 등이다. 조선시대 후기에 사찰은 예외 없이 경제적인 수탈과 어려움을 겪었으므로 대부분 향화승을 별도로 운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참고문헌

  • 오형근, 「조선전기의 불교와 생활세계」, 『한국사상사대계』4,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 유기정, 「조선전기 승정의 정비와 운영」, 『청람사학』5, 한국교원대학교 청람사학회, 2002.
  • 진나라, 「조선전기 社長의 성격과 기능-불교신앙활동을 중심으로」, 『한국사상사학』22, 한국사상사학회, 2004.
  • 하종목, 「조선초기 사원경제-국가 및 왕실 관련 사원을 중심으로」, 『대구사학』60, 대구사학회,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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