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대(置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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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사건 당사자, 증인 그리고 관련인들이 직접 대면하여 사건의 전말을 진술하고 조사받는 것. 대질 심문.

내용

치대(置對)란 일종의 대질 심문으로 사건 당사자, 증인 그리고 관련인들이 직접 대면하여 사건의 전말을 진술하고 조사받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소송은 문서 증거를 통해 결정되지만 진상을 밝히기 위하여 필요할 경우 관련자들을 대질하여 증언과 진술을 요구하였는데 이를 치대라 하였다. 치대는 소송에 신중을 기하여 옳고 그름을 가려서 밝히기 위해 행해지는 것이므로 사건 당사자가 상대방과 치대를 요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치대하는 것은 범죄자 취급을 받는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에 불명예스럽게 여겼다. 1663년(현종 4) 청나라에서 수입을 금지한 유황을 들여온 것과 관련하여 청나라 사신이 조선의 정사(正使)와 부사(副使)를 불러들여 직접 치대한 적도 있었다. 이와 관련해 좌의정 원두표(元斗杓)는 "심양에 있었을 때부터 혹 대신이 모욕을 받는 일은 있었어도 치대를 당하는 수모는 받아본 적이 없었는데 지금 만약 뜰 안에서 사문(査問)을 받는 일을 면하지 못하게 된다면 너무도 불행한 일이라 할 것입니다."라고 하여, 치대 받는 것을 수모로 느끼고 있음을 밝히기도 했다.

또 치대를 받는 심적 압박이 매우 컸던 것으로 보인다. 1705년(숙종 31) 3월 정언조태억(趙泰億)의 상소문에서, 상중(喪中)에 읍의 노비를 간통한 한영휘(韓永徽)가 치대할 때 모호하게 설명한 이유를 조태억은 "위협과 제압에 겁을 내어 그런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용례

掌令鄭而漢啓 集賢殿博士李芮嘗爲宗簿直長 與仁壽府判官柳孝聯相詰 今獨劾孝聯 供招不同 芮雖經筵官 然秩卑 且謝前也 請與孝聯一處置對 上曰 經筵官無置對舊例 且非私罪 當以證左爲定(『세종실록』 24년 12월 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