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여송(李如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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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조선에 파견된 명의 무관 중 최고지휘관.

개설

요동 철령(鐵嶺) 출신의 장수로 이성량(李成梁)의 장자이다. 수년간 요동의 지역 사령관이었으며 1579년 영원백(寧遠伯)의 칭호를 얻었다. 임진왜란 시기 명나라 군대의 총지휘관으로 평양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가계

명 초 압록강 남쪽 강기슭을 건너 철령으로 이주한 이응니(李膺尼)의 6대손이다. 그 후 이응니의 아들인 이영(李英)이 씨족사회의 설립자가 되었으며 철령을 수비하는 주둔지의 세습직을 담당하였다. 그의 직계 자손은 그의 자리를 이어받았다(『선조수정실록』 26년 9월 1일). 이여송도 스스로 말하기를, “선조가 대대로 두만강 가에 살다가 동녕위(東寧衛)에 옮겨 살았다”고 하였다(『선조실록』 26년 3월 24일).

활동 사항

수년간 요동의 지역 사령관이었으며 1579년 영원백(寧遠伯)의 칭호를 얻었다. 이여송의 부친 이성량은 그의 가문 중에서 가장 이름난 장군으로 요동에서 만주의 침략을 계속 방어하면서 유명해졌다. 이여송의 군 생활은 그의 아버지 직위를 물려받는 것으로부터 시작했으며 영원백의 작위도 물려받았다. 1592년 이여송은 발배(哱拜)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때 임무를 성공함에 따라 명성을 쌓게 된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3월 유동양(劉東暘)과 허조(許朝), 영하(寧夏)의 사령관인 장유충(張維忠) 휘하의 일당이 반란을 일으켜 관료인 당성과 부감찰관석계방을 죽였다. 발배는 명의 지배에 있던 몽골인으로 그들은 영하를 근거지로 삼아 주변 지역을 공격했다.

7월 반란군들이 오르도스 몽골로부터 증강된 병력을 기다리고 있음을 알게 되자, 강서의 감찰관인 섭몽웅(葉夢熊)의 명령을 받는 5개의 명의 군대가 영하를 공격해 반란군과 몽골군이 접촉하려는 시도를 좌절시켰다. 하지만 이여송의 증강된 병력이 월말에 도착하기 전까지 반란군은 여전히 저항하고 있었다. 정부군은 영하에 대한 몇 차례 공격을 감행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마침내 정부군은 도시를 물에 잠기게 하기로 결정했다. 발배는 한 번 더 오르도스 몽골에 증강 병력을 요청했다. 마침내 오르도스 몽골의 사령관인 복실면(卜失免)과 타정태길(打正台吉)이 4천 명의 기병과 함께 영하(寧夏)에 도착했지만 명의 군대는 그들을 패배시켰다. 9월 그들은 심각한 식량난에 빠졌으며, 도시의 성벽은 조금씩 붕괴되어 갔다. 이때 이여송은 1천 명의 군대의 선봉장으로 있었으며 많은 수의 증강된 병력은 도하를 통한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이여송은 발배의 반란을 진압하게 된다.

이후 이여송은 조선과도 인연을 맺게 된다. 1592년 5월 조선에 임진왜란이 발생했다. 일본군 선봉 소서행장(小西行長)의 군대는 5월 3일 한양을, 6월 24일에는 평양을 점령했다. 가등청정(加藤淸正)의 군대는 함경도 회령(會寧)에 도달하였다. 선조는 의주로 피난가면서 명에 원군을 요청했다. 명나라는 9월 23일 송응창(宋應昌)에게 전권을 주고 이여송을 무관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이여송은 그의 군대를 각각 우군(右軍), 중군(中軍), 좌군(左軍)으로 삼고 두 명의 부사령관으로 장세작(張世爵)과 양원(楊元)을 두고 군대를 지휘하였다. 그의 동생인 이여백(李如栢), 이여매(李如梅), 이여오(李如梧) 역시 그의 군대에 참여하였다(『선조실록』 26년 1월 11일). 명군의 지원 병력은 포병을 합쳐 대략 최대 3만 6천 정도로 추산되었다.

1593년 1월 27일 이여송의 군대가 의주에 도착했다. 2월 6일 명군은 조선의 지원을 받아 일본군이 점령한 평양을 화포로 둘러쌌다. 그날 아침 공격이 시작되자 명군의 포격과 불화살은 일본의 조총과 화포의 화력을 뛰어넘어 평양성의 돌벽과 나무문을 파괴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이여송은 그의 말이 총에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으며, 병사들의 사기를 부추기면서 전투에 임했다. 그 결과 평양성 전투는 이여송의 승리로 끝이 났으며 일본군은 얼어붙은 대동강을 건너 남쪽으로 병력을 이동했다(『선조실록』 26년 1월 11일). 참획된 자 1,500명, 불에 타 죽은 자 6,000명, 물에 빠져 죽은 자 5,000명 등 전체 사상자가 6만여 명에 이를 정도로 치열한 전투였다.

평양성 전투에서는 해외에서 들여온 화포가 사용되었다. 이 대포들은 사정거리가 5~6리(약 2~2.4㎞)에 이르는 것으로 일본군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 2월 27일, 이여송은 개성을 수복한 이후 성공에 취해 있었고 송응창의 계속되는 경고를 듣지 않고 적은 수의 군사만을 이끌고 서울 북쪽 30리(약 11.8㎞)쯤 되는 벽제관으로 진군했다.

적을 과소평가하고 경계를 소홀히 하였기에 그의 선봉대는 일본의 6~7천 명의 매복병을 벽제관에서 만나 패하였다(『선조수정실록』 26년 1월 1일). 이 패배에 불안해진 이여송은 양원과 함께 평양으로 돌아갔으며 이여송과 그의 병사들은 사기가 저하되었다. 한편 총병사대수(査大受)가 이끄는 병사는 서울과 인접한 용산을 빼앗았고 성공적으로 그곳의 식량 창고를 파괴했다. 이로 인해 일본군은 그 수개월간 그들의 병사를 먹일 수 있는 군량을 거의 얻지 못했으며 더구나 유행병이 돌았다. 일본군도 계속 싸움을 진행할 상황이 아니어서 평화협상이 재개되었다. 반면 이순신의 해군은 일본군에 대해 매우 성공적인 공격을 하고 있었으며, 일본군은 해로를 오가는 데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명군도 역시 어려움에 처해 있었는데, 이는 그들로 하여금 일본의 협상 재개 제안에 동의하게 만들었다.

이여송은 벽제관 패배로 인해 그 자신과 군대의 철군을 요청했다. 병부 상서 석성(石星)이 그를 도왔다. 이여송이 철군을 요구한 이유는 불충분한 군량, 조선의 습한 여름 기후, 유행병, 그리고 부장들 사이에서 불화가 발생했기 때문이라 하였다. 이로써 최고사령관인 이여송과 송응창은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송응창은 군대의 철군에 반대했으며 싸움이나 협상의 준비를 희망했다. 이여송은 오직 협상을 통한 완전한 철군만을 바라고 있었다. 하급 부장과 병사들 사이에도 북병과 남병 사이의 불화가 존재하여 이여송을 고민케 했다(『선조실록』 26년 2월 20일).

명 조정으로부터 이여송과 송응창 모두 북경으로 돌아오라는 명령이 내려졌고 1593년 10월에 회군하였다. 몇 달이 흐른 뒤 이여송은 그의 공로에 대한 보상을 받았다. 하지만 많은 관료들은 그의 완화정책을 비난했다.

이후 요동으로 돌아가 1597년 다시 사령관으로 임명돼, 요동을 넘어오는 몽골인들을 급습해 전과를 올렸다. 1598년 광녕에서 몽골인과의 전투에서 전사했다(『선조실록』 31년 4월 17일)(『선조실록』 31년 4월 17일). 조선은 이여송의 화상(畵像)을 평양에 모시고 제사를 지내주었다(『선조수정실록』 31년 5월 24일).

그의 장손인 이세충(李世忠)은 지휘관이 되었다. 게다가 영원백의 칭호를 이어받았다. 그리고 그의 차남 이현충(李顯忠)은 세습되는 수비대 사령관의 칭호를 받았다.

묘소

황제는 그의 사후 충렬(忠烈)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영원백의 작위를 수여하였다. 또한 그의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그는 요녕 북쪽의 상흥점(常興店: 현 요령성 북진시 서남쪽)에 묻혔다.

상훈 및 추모

참고문헌

  • 『상촌선생집(象村先生集)』
  • 樊樹志, 『萬曆傳』, 人民出版社, 1993.
  • 樊樹志, 『晩明史(1573~1644)』, 復旦大學出版社, 2003.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