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손(李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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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39년(세종 21)∼1520년(중종15) = 82세]. 조선 전기 세조(世祖)~중종(中宗) 때의 문신. 의정부 찬성(贊成) 등을 지냈다. 자는 자방(子芳)이고, 시호는 호간(胡簡)이다. 본관은 광주(廣州)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평안도병마절도사(平安道兵馬節度使)를 지낸 이수철(李守哲)이고, 어머니 양성 이씨(陽城李氏)는 관찰사(觀察使)이맹상(李孟常)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사온서(司醞署) 주부(主簿)를 지낸 이우생(李遇生)이며, 증조할아버지는 형조 좌참의(左參議)를 지낸 이양중(李養中)이다. 중종 때 정국공신(靖國功臣) 3등이 되었으며, 만년에 영의정유순(柳洵)·판서안침(安琛) 등과 함께 구로회(九老會)를 만들어 유쾌하게 여생을 보냈다.

세조~성종 시대 활동

1459년(세조 5) 사마시(司馬試)의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1세였다. 학문을 하는 여가에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하였으므로 세조가 특별히 선전관(宣傳官)에 보임하였다.

1470년(성종 1) 별시(別試)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32세였다. 1471년(성종 2) 성종을 추대하는 데에 공훈이 있는 사람들에게 좌리공신(佐理功臣)을 책훈할 때, 그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녹훈되었다. 참하관(參下官)의 여러 관직을 거쳐 승륙(陞六)하며 예조 정랑(正郞)이 되었다가,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경력(經歷)이 되었다. 1477년(성종 8) 제주도경차관(濟州道敬差官)이 되어 일본의 해적선[海錯船]이 제주 어민들을 살해한 사건을 조사하였다.(『성종실록』 8년 10월 15일)

1478년(성종 9) 점마별감(點馬別監)으로 나갔다가, 봉상시(奉常寺) 부정(副正)이 되었다. 이어 1483년(성종 14) 종부시(宗簿寺) 첨정(僉正)이 되었으며, 1484년(성종 15) 다시 봉상시 부정이 되었다. 1485년(성종 16) 영안도경차관(永安道敬差官 : 함경도경차관)으로 나갔다가 돌아온 후 김해부사(金海府使)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1492년(성종 23)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되어 장례원(掌隷院) 판결사(判決使)로 승진하였고, 또 정3품상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승품되어 충청도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가 되었다.

연산군 시대 활동

1495년(연산군 1) 승문원(承文院) 판교(判校)가 되었다가 다시 장례원 판결사가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중요한 직책들을 맡았는데, 이는 그가 전고(典故)에 밝았을 뿐만 아니라 강목(綱目)에 따라 중요한 정책을 직접 챙기고 잗단 일은 아랫사람에게 맡겨 효율적으로 업무를 추진하였기 때문이다. 1496년(연산군 2)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가 되었다가 1497년(연산군 3)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가 되었다. 1498년(연산군 4) 김종직(金宗直)의 사초(史草)로 인하여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났으나, 이손은 사림파(士林派)가 아닌 훈구파(勳舊派)에 속하였기 때문에 화(禍)를 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오히려 사림파가 차지하였던 삼관(三館)의 청요직(淸要職)에 올랐는데, 1499년(연산군 5) 홍문관(弘文館) 부제학(副提學)에 임명되었다가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으며, 1500년(연산군 6)에는 승정원 우부승지(右副承旨)를 거쳐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가 되었다.

1502년(연산군 8) 함경북도병마절도사(咸鏡北道兵馬節度使), 이른바 북병사(北兵使)가 되었는데, 그는 문관이면서도 무술에 뛰어났으므로 문무를 겸전하였다는 인정을 받아 최전방의 방어를 책임지는 북병사에 임명되었던 것이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자 한성부로 돌아와서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과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을 거쳐 예조 참판(參判)이 되었다. 그리고 척흉청(滌兇廳) 제조(提調)가 되어 사화 때 죽은 자의 집을 파서 연못으로 만드는 일을 담당하였다. 그는 연산군의 서출 왕자 평양군(坪陽君)을 맡아서 길렀는데, 그 어머니는 궁인(宮人) 이씨(李氏)였다. 즉 이손(李蓀)은 연산군이 신임하던 측근이었으므로, 좌상대장(左廂大將)에 임명되어 궁중을 호위(護衛)하는 일을 맡았다. 1505년(연산군 11) 형조 판서(判書)가 되었다가 1506년(연산군 12)에는 병조 판서가 되었다. 그 사이 평안도의 채홍사(採紅使)가 되어 처녀를 바치는 일을 담당하였으므로 연산군으로부터 금대(金帶)를 하사 받기도 하였다.(『연산군일기』 11년 7월 14일)

중종 시대 활동

1506년(중종 1) 9월 1일 새벽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났는데, 반정군이 창덕궁(昌德宮)을 포위할 때 출근 중이던 이손이 이에 가담하였다.(『중종실록』 1년 9월 2일) 연산군을 폐위하고, 중종을 추대하는 데에 공훈이 있는 사람들에게 정국공신을 책훈할 때 이손은 그 3등에 녹훈되고, 한산군(漢山君)에 책봉되었다.(『중종실록』 1년 9월 8일) 이손은 정국공신 박원종(朴元宗)·성희안(成希顔) 등과 나란히 중종의 공신이 되어, 의정부 우참찬(右參贊)이 되었다가 좌참찬(左參贊)이 되었다.(『중종실록』 1년 11월 8일) 1507년(중종 2) 정국공신들은 이손·송일(宋軼) 두 사람을 정승의 후보자로 의망(擬望)하였으나, 송일만 정승이 되고 이손은 정승이 되지 못하였다. 1508년(중종 3) 의정부 우찬성(右贊成)이 되었다가 1509년(중종 4) 의정부 좌찬성(左贊成)으로 승진되었다.

1509년(중종 4) 함경도체찰사(咸鏡道體察使)에 임명되어, 함경도에 사민(徙民)하는 사람들을 6진(鎭)에 안착시키는 ‘입거(入居) 안접사(安接使)’를 겸임하였다. 1510년(중종 5) 이손이 나이가 70세가 넘었다며 치사(致仕)하니, 중종이 이를 허락하지 않고 궤장(几杖)을 하사하였다.(『중종실록』 5년 1월 15일) 이때 이손은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1511년(중종 6) 좌찬성으로서 의금부(義禁府) 당상관(堂上官)을 겸임하여 옥사(獄事)를 다스렸으며, 1512년(중종 7) 일본이 화호(和好)를 요청하자 좌찬성이손은 이를 받아들이도록 건의하였다.(『중종실록』 7년 6월 23일) 1513년(중종 8) 한산부원군(漢山府院君)에 진봉(進封)되었고, 1514년(중종 9) 늙고 병이 들었다고 하며 좌찬성의 관직을 사양하였으나 중종이 한직인 중추부(中樞府) 판사(判事)에 임명하였다. 1516년(중종 11) 이손은 중추부 판사를 사임하고 4년 동안 은거하면서 구로회를 만들어 전 영의정유순 및 전 판서안침 등과 어울려 즐겁게 여생을 보냈다. 그리고 1520년(중종 15) 1월 22일 노병으로 서울의 본가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이 82세였다.(『중종실록』 15년 1월 22일)

성품과 일화

이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성품은 너그럽고 후덕하며 마음가짐이 공경하고 근엄하였다. 집에 있을 때는 어버이를 효도로 섬기고 형제 간에는 우애를 다하였다. 모든 일가친척과 화목하게 지내고 은혜를 베풀어, 일가친척이 병이 들거나 상(喪)을 당했을 때 도와주는 것이 지극하였다. 평소 그의 집에서 먹고 지내는 친척들이 항상 수십 명에 이르렀다. 또 그는 다른 사람과 논설(論說)하기를 즐겼는데, 자기 주장을 곡진하게 타일러도 상대방이 권태를 느끼지 않도록 조리 있게 말하였다. 병이 나서 눕지 않으면 하루라도 내실(內室)에 있지 않고, 바깥 나들이를 하였다.

관직에 있을 때에는 주자(朱子)의 강목(綱目)에 따라 대체(大體)를 유지하려고 힘쓰고 잡다한 일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 큰 의논을 결정할 때에는 한번 결정하면 조금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으며, 송사를 청리(聽理)할 때에는 번거로운 사실을 잘라 없애고 중요한 사실만을 뽑아 분석하여 판단하기를 신명(神明)처럼 하였다. 이속(吏屬)들의 간사한 짓을 용납하지 않으니 백성들은 정황을 숨기거나 속이지 못하였다. 백성들을 다스리는 행정은 관대하면서도 방종으로 흐르지 않았고, 위엄이 있으면서도 가혹한 데에 이르지 않았다. 약한 사람을 도와주어 소생시키고 막힌 문제를 풀어서 나라의 행정을 바로 잡았다. 그러므로 부임하는 곳마다 반드시 명성과 업적이 있어서 모두 그를 칭송하였다.

그는 총명한 머리를 타고나서 한 번 눈으로 보고 한 번 귀로 들은 것은 무엇이든지 종신토록 잊지 않았다. 국가의 전고(典故)와 문물(文物)에서부터 산천(山川)과 도리(道里), 민정(民情)과 물상(物狀)에 이르기까지 자세하게 모두 연구하여, 누가 이에 대하여 질문을 하는 일이 있으면 응답하기를 거침없이 하면서도 실수가 전혀 없었다. 그러므로 후진 관리들이 모든 고증을 그에게 의지하고, 그의 판단을 시채(蓍蔡 : 점을 치는 시초풀과 거북 배딱지)처럼 여겼다. 나이가 들어 전 영의정유순과 전 판서안침 등 젊었을 적에 함께 공부하였던 옛 친구들과 구로회(九老會)를 결성하여 서로 모여 시화(詩話)를 유쾌하게 즐기고, 명절 때마다 노인들이 자제들의 손을 잡고 집안끼리 서로 왕래하니, 당시 사람들이 참으로 아름다운 풍속이라고 칭송하였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호간(胡簡)이다. 묘소는 경기도 광주(廣州) 동쪽 무갑산(武甲山)의 언덕에 있는데, 부인과 함께 합장한 쌍분(雙墳)이다. 이행(李荇)이 지은 신도비명(神道碑銘)이 남아 있다.

부인 경주 이씨(慶州李氏)는 용양위(龍驤衛) 섭호군(攝護軍)이계반(李繼潘)의 딸인데, 자녀는 4남 3녀를 두었다. 장남 이수언(李粹彦)은 문과에 급제하여 의정부 사인(舍人)과 홍문관 교리(校理)를 지냈다. 사람들이 재상으로 기대하였으나, 마흔이 못 되어 요절하였다. 차남 이순언(李純彦)은 내자시(內資寺) 부정(副正)을 지냈고, 3남 이온언(李溫彦)은 재주가 있었으나 과거를 보지 못한 채 일찍 죽었으며, 4남 이성언(李誠彦)은 문과에 급제하여 정국공신에 참여하고 수원부사(水原府使)를 지냈다. 장녀는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성윤조(成允祖)에게, 차녀는 사헌부 감찰(監察)권견(權肩)에게, 3녀는 군자감 정(軍資監正)신엄(申儼)에게 각각 시집갔다. 측실(側室)에서 난 아들 이방산(李方山)은 충좌위(忠佐衛) 사과(司果)를 지냈다.

장남 이수언의 아들 이경(李經)은 장례원(掌隷院) 사의(司議)를 지냈고, 둘째 아들 이위(李緯)는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을 지냈다. 차남 이순언의 아들 이강(李綱)은 음죽현감(陰竹縣監)을 지냈고, 둘째 아들 이기(李紀)는 무과에 급제하여 철산군수(鐵山郡守)를 지냈다.

이손의 부인 경주 이씨는 영특하고 정숙하며 온순하고 아름다웠다. 병마사(兵馬使)이수철(李守哲)이 어진 맏며느리 감을 고르다가, 이씨 부인을 며느리로 얻고 기뻐하기를, “우리 집안일을 맡기더라도 이제 아무런 근심이 없다.” 하였다. 부인 경주 이씨는 위로 시부모를 극진히 받들고 시누이와 동서를 예로써 대하며 아래로 비복(婢僕)들을 사랑으로 어루만지니, 집안 안팎이 화목하여 말이 안방 밖으로 세어나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잗단 일로 남편에게 누(累)를 끼치지 않았다. 이손이 82세까지 많은 복을 누리며 살아간 것도 또한 부인이 그 뜻을 잘 받들었기 때문이다. 부인 경주 이씨가 병이 들자, 아들들이 의원을 청하고 무당을 불러 하늘에 빌려고 하자 부인이 말하기를, “내 나이 80세가 넘었고, 부귀영화를 누리고 살아왔는데, 무엇을 더 바라겠느냐.” 하고, 마침내 허락하지 않았다. 부인 경주 이씨는 남편 이손보다 두 살 연상이었고, 남편보다 2년 앞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이 남편과 똑같은 82세였다. 이손과 부인 경주 이씨는 조선 시대 부귀영화를 누리고 장수한 부부의 한 모델이다.

참고문헌

  • 『성종실록(成宗實錄)』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중종실록(中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용재집(容齋集)』
  •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
  • 『동문선(東文選)』
  • 『동각잡기(東閣雜記)』
  • 『동명집(東溟集)』
  •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임하필기(林下筆記)』
  • 『약천집(藥泉集)』
  • 『점필재집(佔畢齋集)』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해동잡록(海東雜錄)』
  • 『이요정집(二樂亭集)』
  • 『탁영집(濯纓集)』
  • 『번암집(樊巖集)』
  • 『탁계집(濯溪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