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梨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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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남도 단천도호부에 속한 만호진.

개설

이동보는 관방시설로, 선조대에 단천의 숭의보(崇義堡)를 이동(梨洞)으로 옮겼는데, 이때 이름을 이동진(梨洞鎭)이라고 했다.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폐허가 되었다가 1699년(숙종 25)에 군수성환(成瑍)이 고쳐 세웠다. 18세기 중반에는 다시 폐허가 되어 보를 세웠다. 영조대에는 단천의 호타리보(湖打里堡)를 혁파하고 이동진에 합쳤다. 그러다가 고종대에는 이동진마저 혁파되었다.

위치 및 용도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이동은 단천 관아의 북쪽 61리(약 24㎞)에 있었다. 『여지도서』에 따르면 관아의 북쪽 90리(약 35.3㎞) 가파령(茄坡嶺) 아래에 이동보(梨洞堡)가 있었다고 한다.

변천 및 현황

함경남도절도사권중개(權仲愷)의 보고에 따르면 1499년(연산 5) 7월 야인(野人) 30여 기가 이동에 침입하여 노략질을 하고 또 200여 기가 강을 건너와서 주둔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에 첨사박문조(朴文祖)가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잡혀간 백성과 약탈당한 소를 되찾아왔다. 그 과정에서 아군은 전사자 2명, 포로로 잡혀간 남녀가 7명이었고, 우마(牛馬)는 6필을 빼앗겼다. 적군은 1명이 전사, 말 4필, 궁시(弓矢) 등을 잃었다(『연산군일기』 5년 7월 23일).

『대동지지』에 따르면 1608년(선조 41년) 숭의보를 이동으로 옮겼다고 했다. 이에 이름을 이동진이라고 했다. 1745년(영조 21년)에는 호타리보를 혁파하고 이동진에 합쳤다. 1822년(순조 22) 11월경에는 오을족보(吾乙足堡)를 이동에 옮겨 세웠다. 그러다가 1883년(고종 20) 11월 23일 이동보는 완전히 혁파되었다(『고종실록』 20년 11월 23일).

형태

성의 둘레는 467척(약 141.5m)이다.

참고문헌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여지도서(輿地圖書)』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대동지지(大東地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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