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보리(栗甫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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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종성진에 거주한 여진족 추장.

개설

율보리는 종성 일대에 거주한 추장으로, 1583년에 니탕개(尼湯介)와 함께 조선에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니탕개의 난이라고 한다. 이것은 조선 건국 이래 여진인이 일으킨 최대의 변란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반란은 온성부사(穩城府使)신립 등의 활약으로 실패하였다.

활동 사항

1583년(선조 16) 1월에 경원부(慶原府) 아산보(阿山堡)의 추장인 우을지(迃乙知)가 주도하여 난을 일으켰다. 조선군은 초반에 번호(藩胡)의 침입으로 경원성을 함락당하기도 하였지만, 신립과 신상절 등의 활약으로 전세를 역전시켰다. 특히, 2월 16일에 북병사(北兵使) 이제신은 신립과 장의현·신상절 등을 경원진 소속의 탁두(卓頭)부락 등에 보내 반호(叛胡)를 토벌하게 하였다. 신립 등은 탁두 부락을 거의 다 불태우고, 적호 150여 명의 귀를 베는 등 승전을 거두었다. 이렇게 번호의 반란은 막을 내리는 듯하였지만, 니탕개와 율보리가 참전하며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1583년 5월 6일에 조선 조정은 또다시 적 2,000여 기가 종성(鍾城)을 공격하였다는 보고를 받았다(『선조실록』 16년 5월 6일). 이는 니탕개와 율보리를 중심으로 한 회령·종성·온성 등지의 번호가 경원의 번호와 내응한 것으로, 6진 지역은 다시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율보리는 주로 종성진에 속한 주요 진보를 공격하였다. 율보리 등은 1583년 5월 5일에 군사 20,000여 기를 거느리고 3부대로 나누어 종성진을 포위하는 한편, 주변의 응곡(鷹谷)과 동풍(東豊)·서풍리(西豊里)의 농민과 가축을 약탈하였지만, 이날 저녁 신립의 구원군이 이르자 적병은 퇴각하였다. 다음 날과 13일에도 율보리는 종성진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후퇴하였다. 5월 16일에도 30,000여 기를 이끌고 동관진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였으나, 조방장박선과 동관진 첨절제사정곤 등의 강력한 저항으로 퇴각하였다(『선조수정실록』 16년 5월 1일)(『선조수정실록』 16년 5월 1일).

율보리 등은 몇 번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마지막 일전을 준비하였다. 바로 같은 해 7월 19일에 방원보를 공격한 것이다. 조선군도 진장인 최호뿐만 아니라 북병사김우서, 조방장이발, 조전장이천 등이 함께 지키며 방어에 만전을 기하였고, 결국 승리하였다(『선조수정실록』 16년 5월 1일). 이 전투를 계기로 니탕개의 난은 완전히 진압되었고, 율보리는 니탕개와 함께 심처(深處)로 도망갔다.

참고문헌

  • 『제승방략(制勝方略)』
  • 『국조보감(國朝寶鑑)』
  • 『난중잡록(亂中雜錄)』
  • 『상촌집(象村集)』
  • 『성호사설(星湖僿說)』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계갑일록(癸甲日錄)』
  • 『북관지(北關誌)』
  • 『북로기략(北路紀略)』
  • 박정민, 『조선시대 여진인 내조 연구』, 경인문화사, 2015.
  • 서병국, 『宣祖時代女直交涉史硏究』, 교문사, 1970.
  • 송우혜, 「조선 선조조의 니탕개란 연구」, 『역사비평』 72, 2005.
  • 윤호량, 「선조 16년(1583) ‘尼湯介의 난’과 조선의 대응」, 『군사』 82, 2012.
  • 한성주, 「임진왜란 전후 女眞 藩胡의 朝鮮 침구 양상과 조선의 대응 분석」, 『동양사학연구』 132,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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