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현(鞍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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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성의 서쪽인 의주로 길목의 인왕산과 안산 사이에 있던 고개.

개설

안현(鞍峴)은 도성의 서쪽 지역인 서교(西郊)의 의주로(義州路)가 지나가는 반송방(盤松坊)에 있는 고개이다. 도성의 돈의문(敦義門)으로 들어가는 길목이었다. 인왕산과 안산(鞍山)을 마주하며 서북 지역에서 도성으로 침입하는 적들을 막을 수 있는 요해처였다.

명칭 유래

안산 아래에 위치하는 고개라서 안현이라고 하였다. 모화관(慕華館)이 인근에 있어서 모화현, 인근 안산에 봉수대가 있어서 봉화재, 홍제동 고개, 무학 대사가 도성을 찾던 곳이라고 하여 무학재, 홍제동에 위치한 모래내와 연계하여 모래재 혹은 사현(沙峴) 등 여러 명칭으로 불렸다. 호랑이가 자주 출몰하여 사람들을 모아 고개를 넘는다고 하여 모아재라고도 하였다.

자연 환경

북한산에서 인왕산으로 이어지는 산세의 마지막 자락인 형세로 북쪽에는 삼각산, 남쪽에는 한강이 있다.

형성 및 변천

어영청(御營廳)에서 안현 인근의 식목(植木)을 관리하였다. 조선후기 수도권의 방어를 담당하던 군영(軍營)에서 도성 내외를 구분하여 내산(內山)과 외산(外山)을 경계로 소나무를 관리하였다. 안현은 외산에 소속되었으며 어영청이 맡아 관리하였다. 어영청은 도성 내부인 내산은 숙정문(肅靖門) 삼청동(三淸洞) 냇가 서쪽 북악(北岳)에서 창의문(彰義門) 대로(大路) 동쪽까지와 창의문 대로 서쪽에서 돈의문 북쪽까지를 맡았다. 외산은 사현 이북으로 서곡강(西曲江)까지와 남쪽으로 안현의 제1, 제2, 제3봉(峯) 안쪽까지 나누어 맡아 관리하였다(『고종실록』 19년 10월 21일)

위치 비정

도성의 돈의문 외부인 서교에 위치하며 팔각현(八角峴), 만리현(萬里峴), 우수현(雨水峴)과 같이 성중(城中)을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지형이다(『영조실록』 21년 7월 14일). 오늘날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의 안산 도시자연공원이다.

관련 기록

1624년(인조 2)에 이괄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의주로를 거쳐 도성으로 진입한 반란군이 이곳에서 정부군에게 패하였다. 정부군의 정충신(鄭忠信)이 안현에 올라가 이괄의 군대를 대적하자고 하였다. 이에 정부군이 야음을 틈타 안현에 진을 쳤다. 이괄의 군대는 궁궐에 진입한 이후 도성을 나와 안현 아래를 지나가다가 대패하여 수구문(水口門)을 거쳐 패주하였다(『인조실록』 2년 2월 11일). 당시 안현에는 도원수장만(張晩)이 선봉장 정충신, 남이흥(南以興), 변흡(邊潝), 신경원(申景瑗), 김완(金完), 유효걸(柳孝傑) 등에게 정예병 4,000여 명을 거느리고 주둔하도록 했다(『인조실록』 2년 2월 14일).

안산에는 돈대(墩臺)를 설치하여 방어 시설을 두고자 했으나, 주변 산세와 연결되지 않고 홀로 떨어져 있어 세우지 못했다(『숙종실록』 36년 10월 3일). 안산에는 봉수장(烽燧將)과 봉수군(烽燧軍)이 주둔하였다. 목멱산(木覓山)에서 봉화를 올리면 응답해야 하는 봉수였다. 그런데 황혼녘이 된 뒤에 갑자기 구름이 끼어 어두워지는 경우에는 시야가 확보되지 않아 봉수를 실패하기도 하였다. 봉수 제도에서 안현의 대봉(對峯)은 고양(高陽)의 해포(醢浦)와 고봉(高峯) 두 지역이었다(『영조실록』 5년 6월 16일). 간송박물관에 소장된 겸재정선의 『안현석봉(鞍峴夕烽)』에는 안현의 봉수대에 봉화불이 오른 것을 한강에서 바라본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한경지략(漢京識略)』
  • 나각순, 『서울의 성곽』,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04.
  •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서울지명사전』,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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