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씨(博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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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금~청시기 문관을 지칭하던 칭호 중 하나.

개설

중국어로 ‘박식한 사람’을 지칭하는 보시([博士], boshi) 또는 몽골어로 ‘사부(師傅)’를 지칭하는 박시(baghshi)에서 유래한 박시([博氏], baksi)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원래 문학과 사리에 밝은 자들을 지칭하던 칭호였다. 이후 문신들 중 문자를 잘 알고 학식이 출중한 이들에게 특별히 사여하는 명예 직함으로 활용되거나, 또는 문서 관리나 번역 등을 담당하는 문신 집단 일반을 지칭하는 칭호로 사용되었다. 파극십(巴克什)·방식(榜式)·방십(榜什)·파십(把什)이라고도 불리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616년 누르하치([奴兒哈赤], nurhaci)가 후금을 건국하면서, 문관의 역할을 담당하는 이들에게 박씨라는 칭호가 수여되었다. 이는 무관 중 출중한 인물을 지칭하는 용어로써 ‘용사(勇士)’라는 뜻을 가진 ‘바투루([巴圖魯], baturu)’라는 호칭에 비견되는 것이었다. 이들은 주로 문서의 생산과 관리, 역사서 번역 등의 업무에 종사하였다.

조직 및 역할

당초에는 수여 대상이나 인원수 등에 별다른 제한 규정이 없었다. 누르하치는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이들이 귀부해 올 경우 이들에게 박씨의 칭호를 수여하였다. 후금 건국 무렵에는 8명 규모의 관직으로 정립되었고, 1622년에는 의정(議政)의 권한을 가진 여덟(8명의) 호쇼이 버일러들을 보좌할 측근으로 만주인 8명, 한인 8명, 몽고인(몽골인) 8명의 박씨가 배정되었다. 이들은 부세를 면제받는 대신 문자와 기록, 번역 관련 업무를 수행하였다. 이들은 여러 차례 조선에 사신으로 파견되기도 하였는데(『인조실록』 19년 10월 18일)(『인조실록』 20년 12월 4일)(『인조실록』 21년 9월 3일)(『인조실록』 22년 6월 1일) 조선과의 소통에 활용할 수 있는 한문에 능통하였다는 점에 주목한 결과로 추정된다.

이들은 만주 문자의 창제 과정에도 참여하였다. 어르더니([額爾德尼], erdeni) 박씨는 1599년 ‘노만문(老滿文)’이라 불리는 무권점(無圈點) 만주 문자를 창제하였고, 이후 1632년에는 다하이([達海], dahai) 박씨가 점과 동그라미를 첨가한 유권점(有圈點) 만주 문자, 곧 ‘신만문(新滿文)’을 창안하였다.

변천

문관 집단 일반을 지칭하는 명칭으로서의 박씨는 1631년 필첩식(筆帖式)이라는 호칭으로 개정되었다. 그러나 일종의 존호로서 박씨는 입관 후에도 계속 유지되었다.

참고문헌

  • 『만문노당(滿文老檔)』
  • 유소맹 저, 이훈·이선애·김선민 역, 『여진 부락에서 만주 국가로』, 푸른역사, 2013.
  • 패멀라 카일 크로슬리 저, 양휘웅 역, 『만주족의 역사』, 돌베개, 2013.
  • 최진규, 「청의 중국 지배와 필첩식」, 『중국사연구』 46,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