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관(同文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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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청 동치 1) 청국이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 팔기군(八旗軍) 자제들을 선발해 서구 제도와 언어를 가르치기 위해 설치한 교육기관.

개설

청나라는 아편전쟁을 치른 뒤 영국과 유럽 국가들에게 개항을 하는 불평등조약을 맺었다. 이때 맺은 영국과 체결한 남경조약으로 5개의 항구를 개방했는데 이 조약은 이후 불평등조약의 대명사가 되었다. 1856년(청 함풍 6) 영국이 프랑스와 같이 애로호 사건을 일으켜 북경을 함락시킨 2차 아편전쟁이 발발하였다. 이후 청나라는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며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려는 시도를 하게 되는데, 그 일환으로 유럽 각국의 언어를 번역하고자 동문관을 설립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동문관은 청나라가 외국과의 교섭이 늘면서 그들의 기질과 속성을 알아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설립되었다. 일단 교섭을 위해서는 언어 소통이 이루어져야 했기에 이를 위해 각국 언어 번역 기관인 동문관을 설립한 것이다. 광동과 상해의 상인 중에서 영국, 프랑스, 미국의 언어에 능통한 자들을 북경으로 초빙하여 13~14세 정도의 팔기자제(八旗子弟)들을 가르치게 하였다. 1862년 7월 25일 총리각국사무(總理各國事務) 공친왕(恭親王)은 「신설동문관작의장정육조(新設同文館酌議章程六條)」를 황제에게 상주하면서 학교 이름을 동문관이라고 할 것임을 알리고 재가를 받았다. 그런데 이때 프랑스어 교사를 구하지 못해 약간 지체되었는데, 그 사이 러시아어도 학습 과목으로 추가되었다.

조직 및 역할

1863년 3월부터 정식으로 동문관의 교육이 시작되었다. 미리 선발한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의 3개 과에 6명의 교사와 30명의 학생이 학습을 하였다. 당초 번역 인재를 양성하려던 동문관은 천문산학에 대한 교육도 첨가하면서 단순한 외국어 교육기관에서 근대 과학학교로 변모하였다. 그런데 당시 수구파 인사들의 반대로 인해 천문산학의 교육이 정상으로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수구파의 서양 배척 운동은 동문관 입학생이 격감하는 원인이 되었다. 동시에 교육을 담당할 교사들의 초빙도 정상적으로 이어지지 못해 결국 좋은 결과를 내지 못했다. 결국 천문산학 교육은 1년여 만에 철폐되었다. 그러다 1878년(청 광서 4) 천문교육을 담당할 교사가 당도하여 교육이 이루어진다. 따라서 이때에 이르러서야 동문관은 단순한 외국어 교육기관에서 근대적인 교육기관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1872년 동문관의 개설 과목은 어문(語文), 산학(算學), 격치(格致), 화학(化學), 의학(醫學) 등이었고 학생은 92명이었다. 1870년에는 프러시아가 보불전쟁(普佛戰爭)에서 승리하자 독일어를 어학의 하나로 채택하기도 하여 세계정세에 따라 교육정책이 변화되는 모습을 보였다. 1885년(청 광서 11) 학생의 입학 자격이 확대되어 10~25세 사이의 만한(滿漢) 자제도 시험을 치러 입학할 수 있었다.

변천

1895년(청 광서 21) 청일전쟁의 패배 이후 청나라에서는 근대 교육에 대한 열망이 비등해지면서 동문관만으로는 욕구를 충족시키기 어려워 교육개혁이 필요해졌다. 서양의 학문을 그대로 답습하는 교육방식도 재고되었다. 그러다가 1900년 의화단의 난 이후 동문관의 그 기능이 일시 마비되었고, 그해 12월에는 경사대학당(京師大學堂)에 흡수되었다.

참고문헌

  • 손준식, 「청말의 신무학당에 대한 일고찰-북경 동문관의 변천과정과 그 운영을 중심으로」, 『중앙사론』6,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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