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유당(德游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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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궁 회상전 서북쪽에 있는 건물.

개설

덕유당(德遊堂)은 경희궁의 침전 서북쪽에 있는 전각이다. 1720년(경종 즉위)에 숙종비 인원왕후(仁元王后)가 머물렀으며, 경종비 선의왕후(宣懿王后)가 거처하기도 하였다. 1767년(영조 43)~1776년(영조 52)에는 영조가 신하를 만나고 강론하는 곳으로 사용하였으며, 백성들 중 기로에 든 노인이나 어린이들에게 쌀을 베푸는 곳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하였다.

덕유당의 후면에는 2칸 규모의 사물헌(四勿軒)이 붙어 있다. 사물헌은 1760년(영조 36)에 영조가 이름 지은 것이다. 사물(四勿)이란 『논어(論語)』에서 금하는 4가지로, 예(禮)가 아니면 보지 말고 듣지 말고 말하지 말고 움직이지 말라는 의미라고 한다.

위치 및 용도

덕유당은 경희궁의 회상전(會祥殿)의 서북쪽에 있으며 그 서쪽에는 자정전(資政殿)이 있다. 회상전 뒤편에 형성된 높은 축대 위에 지어졌다. 영조의 어머니 인원왕후와 형수 선의왕후가 머물던 곳으로 의미 있는 장소가 되었다. 또 지형이 높아 서편의 교외가 내려다보여, 서오릉의 명릉(明陵)에 모셔진 숙종과 인원왕후의 회상을 일으키는 장소가 되었다. 영조는 덕유당에서 명릉에 올릴 향을 지영하기도 하도 명릉으로 향을 전하기도 하였다. 경희궁 북쪽에 위치한 육상궁에 향을 전할 때에도 덕유당에서 행하였다(『영조실록』 51년 3월 23일)(『영조실록』 51년 11월 6일).

영조는 덕유당에서 문신과 무신들을 모아 강론하기를 자주 하였으며, 문신이나 유생들을 모아 제술 시험을 보거나 문신과 무신의 활쏘기 시험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무신들에게 능마아강(能魔兒講)과 같은 병서 강독 시험을 보고 합격자들에게 상을 주기도 하였다(『영조실록』 43년 12월 19일)(『영조실록』 43년 8월 8일). 또 인근에 살고 있는 노인들을 불러 쌀을 하사하거나 음식을 내려주어 위로하였다. 이처럼 영조는 덕유당을 신료들과 유생들뿐 아니라 백성을 만나 소통하고 격려하는 장소로 사용하였다.

변천 및 현황

덕유당은 영조대에 가장 활발하게 사용되었으며, 순조가 경희궁에 이어했을 때도 활용되었다. 그러나 19세기 말에 경희궁의 활용이 줄어들면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었고,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면서 경희궁에는 빈터만 남게 되었다. 현재 덕유당의 모습은 「서궐도안(西闕圖案)」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해 볼 수밖에 없다.

형태

장대석 기단 위에 정면 4칸, 측면 3칸의 규모이다.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용마루 양 끝에 치미로 장식하였다. 건물의 좌향은 동향이며 후면에는 연달아 2칸의 작은 건물이 있는데, 사물헌이라 하였다.

관련사건 및 일화

덕유당의 서북쪽에는 암석이 있는데, 이것을 서암(瑞巖)이라 하였다. 1773년(영조 49)에 영조는 덕유당에서 신하들과 『대학(大學)』을 강론하고 서암을 살펴본 후 서암송(瑞巖頌)을 지어 올리라 하였다. 영조가 서문을 지었는데, 그 내용에 서암의 유래가 상세히 담겨 있다. 광해군이 덕유당 서북에 위치한 암석이 왕암(王巖)이라는 말을 듣고 그곳에 궁궐을 세웠는데, 그것이 경희궁이다. 왕암이 자리한 곳은 인조의 아버지 원종의 옛집이었다. 이후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경희궁에 임어하였으며, 숙종은 암석의 이름을 서암이라 고쳐 짓고 어필로 써서 사방석에 새겼다(『영조실록』 49년 11월 12일).

참고문헌

  • 『궁궐지(宮闕志)』「서궐도안(西闕圖案)」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