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관(內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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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내명부(內命婦)의 하나로서 왕의 후궁(後宮).

개설

내관(內官)은 내명부의 하나로서 대전(大殿)에 속하는 빈(嬪)이하 숙원(淑媛)까지와 세자궁(世子宮)에 속하는 양제(良娣)이하 소훈(昭訓)까지를 일컫는다. 조선초기부터 ‘내관’ 또는 ‘여관’ 등으로 불리던 궁녀 조직이 성종대에 와서 『경국대전』에 ‘내명부’라 명시되고, 조선말기까지 수정 없이 그대로 이어졌다. 내관은 궁중에서 각각 맡은 직무에 따라 공적인 일부터 사사로운 시중까지 다양하게 왕 및 왕실을 보필하였다.

내용 및 특징

1) 기능과 역할

내명부의 직무를 구체적으로 명시한 것은 1428년(세종 10)이었다. 기능은 내관과 궁관으로 크게 나뉘고 품계에 따라 각기 고유의 직무가 주어졌다. 내관인 정1품 빈과 귀인(貴人)은 왕비를 도와 부인의 예를 의논하며, 정2품 소의와 숙의는 왕비의 예를 돕고 의논하였다. 정3품 소용과 숙용은 제사 지내는 일과 손님 접대하는 일을 맡았다. 정4품 소원과 숙원은 왕이 평상시에 한가롭게 거처하는 전각을 관장하고, 명주와 모시를 길쌈해 해마다 바쳤다.

그러나 내관의 궁중 활동은 주어진 직무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내관은 종친의 내연(內宴)에 왕비를 따라 참석했으며, 왕비 간택에서도 여러 종친 부인들과 공주들이 함께 참석하였다. 또한 왕비가 친잠례(親蠶禮)를 행할 때도 내·외명부들이 따라서 행하였다. 때로는 왕비의 자녀를 길러주기도 하여 맡은 일 외에도 그 당시의 형편에 따라 다양하게 활동하였다.

내관 즉, 후궁들은 왕의 총애와 공로에 따라 예우를 받았다. 총애받는 후궁에게는 봉작 또는 승격의 영예가 내려졌다. 많지는 않지만 후궁에서 왕비까지 오른 예도 있었다. 반면, 출궁당하거나 징계받는 경우도 많았다.

2) 선발

출신 성분을 보면 삼국시대에는 천인 출신도 있었으나, 고려시대에는 대부분 귀족 출신들이었다. 그러나 고려말기에 와서는 천인 출신도 적지 않았다. 조선초기의 후궁은 신분이 좋은 가문에서 정식으로 맞아들인 후궁과,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나 궁녀로 들어왔다가 승은을 입은 후궁으로 나눌 수 있다. 정식 후궁은 처음부터 왕비나 세자빈처럼 가례색(嘉禮色)을 설치하여 전국의 혼기에 있는 처녀들에게 금혼령을 내리고 간택하여 빙례를 갖추어 맞아들인 경우이다. 그러나 태조·정종 때에는 제도가 미비한 상태였기 때문에 가례색에 의한 간택은 없었다. 단지 몇몇 대신들이 딸을 바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는 천한 가문의 딸로서 승은을 입은 경우는 아니었다. 따라서 태종 때 예조에서 우리나라도 중국 제후의 일취구녀제(一娶九女制)에 준해 1왕비, 3세부(世婦), 5처(妻)제를 채택하되 칭호만은 세부를 ‘빈’이라 하고 처를 ‘잉(媵)’이라 하는 ‘3빈5잉 제도’의 도입을 건의하였다.

태종은 1빈2잉제를 채택하였는데, 가례색을 설치하고 간택하여 빙례로 맞아들인 정식 후궁이 바로 정의궁주(貞懿宮主)이다. 태종은 후궁 간택의 중요성을 자녀를 낳아 왕통을 잇고[人君繼嗣] 왕을 내조하는 데[衆人內助] 있다고 보았다. 때문에 태종은 비록 1빈2잉제를 채택했지만 그 수에 얽매이지 않고 3, 4빈잉을 더 두었다. 아들 세종은 그것을 근거로 자신도 빈잉을 더 두고자 하였다. 이후의 왕들은 그 시대 상황에 따라 한두 번 정도 정식 후궁을 맞아들이기도 하였다.

조선중기와 후기에는 왕비가 자녀를 낳을 가능성이 없을 때 대통을 이을 왕자를 낳기 위해 특별히 간택한 경우가 있었다. 정조의 후궁 원빈(元嬪)과 순조의 생모 수빈(綏嬪) 등이 그에 해당한다. 승은한 후궁은 시녀·관비(官婢)·사비·창기·과부 등의 미천한 출신이었다가 일약 후궁이 되는 경우이다. 기록을 통해 보면 대개 왕의 총애를 받거나, 왕자를 낳거나, 공로가 있는 경우에만 봉작 또는 재차 승격되었다. 그러므로 정식 후궁에 비해 문헌상 나타나지 않은 승은한 후궁이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중·후기에 승은한 후궁으로는, 사도세자의 어머니 영빈이씨(暎嬪李氏)와 광해군의 어머니 공빈김씨(恭嬪金氏), 경종의 어머니 희빈장씨(禧嬪張氏), 그리고 영조의 어머니 숙빈최씨 등이 있다. 이들은 비록 한미한 집안 출신들이었으나, 아들이 세자와 왕이 되면서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 그러나 그 영예가 왕비에 미치지는 못하였다.

변천

전제 왕권이 확립된 삼국시대 이래, 궁중의 운영을 위한 비빈 중심의 궁녀 조직을 계승한 것이 고려의 내직 제도이다. 그러나 고려말까지도 비빈을 비롯한 궁녀 조직은 일정한 규범을 갖추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조선초에 고려의 내직 제도를 바탕으로 중국 당·송·명나라 등의 제도를 참고한 내명부 제도가 성립되었다.

내명부는 품계를 받은 자로서, 위로는 왕과 왕비를 모시고 궁중 내의 일정한 직임을 맡아보며, 아래로 잡역 궁인을 부렸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내명부에는 크게 두 계층이 있었다. 정1품 빈부터 종4품 숙원까지는 왕의 후궁 계층으로 내관이라 하고, 정5품 상궁부터 종9품 주변궁(奏變宮)까지는 상궁 계층으로 궁관이라 하였다.

내관 제도는 1397년(태조 6)에 조준(趙浚), 정도전(鄭道傳) 등이 내관 제도의 확립을 주장하면서 초기적인 제도가 마련되었다. 당시 내관 제도는 현의(賢儀) 정·종1품 각 1명, 숙의(淑儀) 정·종2품 각 1명, 찬덕(贊德) 정3품 1명과 종3품 2명, 순성(順成) 정4품 1명과 종4품 2명, 상궁(尙宮) 정5품 1명과 종5품 2명, 상관(尙官) 정6품 1명과 종6품 2명, 가령(家令) 정·종7품 각 2명, 사급(司給) 정·종8품 각 2명, 사식(司飾) 정·종 9품 각 2명 등 총 28명이다. 이 당시 품계를 받은 사람은 28명으로 모두 내관이지만, 상궁 이하의 궁관과는 구별되지 않았고, 내명부라는 명칭도 그때까지는 아직 사용되지 않았다. 여기서 1품 현의에서 2품 숙의까지는 내관에 해당된다.

1401년(태종 1) 태종은 하륜(河崙)과 권근(權近) 등에게 하(夏)·은(殷)·주(周)나라 3대 이하 역대 군왕의 비빈·시녀의 수와 고려 역대 비빈·시녀의 수를 상고하여 아뢰게 하였다. 그리고 1405년 현의 1명, 숙의 1명, 찬덕 1명, 순덕(順德) 2명, 사의(司儀) 2명, 사침(司寢) 1명, 봉의(奉衣) 2명, 봉선(奉膳) 2명 등 내관 제도를 정비하였다. 명칭상 현의에서 찬덕까지는 내관에 해당된다.

1428년 3월 당나라의 제도를 참작해 품계·명칭·인원·소장 사무 등을 구체적으로 규정한 제도가 마련되었다. 당시 내관으로는 정1품 빈·귀인 각 1명, 정2품 소의(昭儀)·숙의(淑儀) 각 1명, 정3품 소용(昭容)·숙용(淑容) 각 1명, 정4품 소원(昭媛)·숙원 각 1명이 있었다. 이하 정5품 상궁 이하는 궁관에 해당된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왕을 모시는 내관과 궁중의 모든 일을 처리하는 궁관이 구별되었다는 것이다.

『경국대전』에서는 태조·태종·세종의 3대에 걸쳐 시행된 제도를 검토하여 취사선택하고 규모만 약간 늘린 상태에서 법제화하게 되었다. 당시 내관제는 정1품 빈 1명, 종1품 귀인 1명, 정2품 소의 1명, 종2품 숙의 1명, 정3품 소용 1명, 종3품 숙용 1명, 정4품 소원 1명, 종4품 숙원 1명이었다. 이하 정5품 상궁에서 종9품 주변궁까지는 궁관에 해당한다. 즉 내명부를 크게 내관과 궁관으로 구별하고 문무 관제에 준하여 18등급의 품계로 정비하였다. 인원은 35명으로, 『예기』「왕제(王制)」 편의 삼세부(三世婦)·오처(五妻)·이십칠첩(二十七妾)의 수와 일치한다.

한편, 1430년에는 동궁 내관의 관제·칭호·품질 등을 옛 제도를 참고해 정하였다. 당시 동궁 내관 제도는 정2품 양제 1명, 정3품 양원(良媛) 1명, 정4품 승휘(承徽) 1명, 정5품 소훈 1명이었다. 이하 종6품 사규(司閨)에서 종8품 장의(掌醫)까지는 궁관으로 총 13명이었다. 품계에서 내관은 정품(正品)으로만 되었고, 궁관은 종품(從品)으로 구별하였다. 인원수는 내관 4명, 궁관 9명으로 총인원 13명이었다. 왕에 비해 품계도 낮고 규모도 작았으나 맡은 사무는 비슷하였다.

『경국대전』에는 세종 때의 제도를 수정·보완하여 법제화하였다. 이에 따르면 종2품 양제 1명, 종3품 양원 1명, 종4품 승휘 1명, 종5품 소훈 1명이었다. 이하 종6품 수규(守閨)에서 종9품 장의까지는 궁관으로 총 13명이었다. 인원은 변함이 없지만 품계가 정에서 종으로 변하였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김용숙, 『조선조 궁중풍속 연구』, 일지사, 1983.
  • 박영규, 『환관과 궁녀』, 김영사, 2004.
  • 신명호, 『궁녀: 궁궐의 꽃』, 시공사, 2004.
  • 이영숙, 「조선초기 내명부에 대하여」, 『역사학보』 96,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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