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천정(樂天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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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태종이 한강변 언덕에 세운 왕실 소유의 정자.

개설

낙천정(樂天亭)은 1418년(태종 18)에 왕위를 세종에게 양위한 태종이 그해 9월 이곳 대산(臺山)에 이궁(離宮)을 지을 때 산상에 같이 지은 정자이다. 이듬해인 1419년(세종 1) 2월에 낙성했다.

위치 및 용도

오늘날 서울특별시 광진구 자양동에 위치한다. 한양의 정치와 문화의 중심 역할을 한 정자 중 대표적인 곳이다. 낙천정이 위치한 대산은 표고 42.8m로 시루를 엎어 놓은 모양과 비슷하다고 하여 ‘시리미’라고도 불렸다. 주변에 다른 높은 지형이 없어 아름다운 한강을 조망할 수 있었다.

조선초기에 정종·태종·세종이 자주 거둥하였는데, 특히 세종대에 자주 거둥하였다. 세종은 동교(東郊)에서 매사냥을 구경하면서 낙천정에서 휴식을 취했다(『세종실록』 1년 3월 25일)(『세종실록』 3년 9월 11일)(『세종실록』 8년 1월 23일). 태종이 만년에 낙천정에 머물렀기 때문에 세종이 이곳에서 상왕과 신하를 위한 주연을 베풀기도 하였다(『세종실록』 1년 6월 6일)(『세종실록』 15년 5월 11일). 세조는 노산군(魯山君)과 함께 낙천정에서 매사냥을 구경하거나 고기 잡는 모습을 즐기기도 했다(『세조실록』 2년 4월 1일). 성종 또한 낙천정에서 열병과 활쏘기를 구경하였다(『성종실록』 3년 3월 2일)(『성종실록』 8년 2월 18일).

그 밖에 조선시대의 왕들은 명나라 사신이 왔을 경우 이곳에서 연회를 베풀기도 했다. 세종은 상왕인 태종을 따라 살곶이벌[箭串平]에서 매사냥을 즐긴 후 낙천정에서 연회를 즐겼다. 성종은 활쏘기와 군대 열무 등 군사훈련 장소로 활용하였다. 문종과 중종대에 수리를 한 기록이 있고, 인조대 이후에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인조대까지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변천 및 현황

「낙천정기(樂天亭記)」는 변계량(卞季良)이 짓고 한성부윤(漢城府尹)권흥이 판각하여 낙천정에 걸었다(『세종실록』 1년 9월 4일). 조선시대 왕들의 연회, 활쏘기, 군대 열무, 장소로 이용된 낙천정은 세종대에 관리가 소홀해지자 관리 촉구 의견이 제시되었다(『세종실록』 23년 윤11월 10일). 문종은 낡았으나 허물지 말고 수리하라고 지시하였고(『문종실록』 1년 2월 9일), 중종대에도 낙천정의 수리가 이루어졌다(『중종실록』 36년 2월 21일). 인조대에 ‘낙천정의 채전(菜田)을 봉상시(奉常寺)에 돌려주라’는 기록(『인조실록』 1년 5월 27일) 이후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1960년대에 낙천정 일대는 도시 개발로 인해 강변도로와 주택지로 변했다. 1991년에 대산 근처에 민영주택 건설 사업을 시행하였고, 현 위치에 복원하여 구청에 기부하였다. 1993년에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12호로 지정하였으나 정밀조사 결과 위치와 건축 양식이 조선전기 양식이 아닌 것으로 밝혀져 2009년 10월 22일 기념물에서 해제하였다. 현재 원위치에는 표석이 설치되어 있다.

형태

원래의 형태는 알 수 없으나, 1991년에 현 위치에 정면 3칸, 측면 2칸 팔작지붕 형태로 복원하였다.

참고문헌

  • 김영상, 『서울명승고적』, 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 1958.
  • 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 『서울의 누정』, 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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