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면호(金勉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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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820년(순조 20)~1866년(고종 3년) = 47세]. 조선 후기 헌종(憲宗)~순조(純祖) 때의 천주교인으로 병인박해(丙寅迫害) 순교자. 세례명은 토마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면호(冕浩) 혹은 계호(季浩)라고도 불렀다.

고종 시대 활동

경북 안동에서 태어난 김면호는 어린 시절 서울 주동으로 이사와 살면서 19세 때인 1839년(헌종 5) 형들인 김익례(金翼禮)와 김응례(金應禮)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이후 천주교 전파를 위하여 조선에 들어온 프랑스 출신 다블뤼(Daveluy) 주교의 시중을 드는 복사로도 1년여 간 활동했으나, 1849년(현종 15) 이래로 오랫동안 천주교 신앙을 버렸다가, 1865년(고종 2) 경 다시 신앙을 가지며 열성적으로 전교에 힘썼다. 그리고 당시 천주교회의 지도급 신자였던 남종삼(南鍾三)·홍봉주(洪鳳周)·이유일(李惟一) 등과 교류하며 교회 일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 무렵 러시아가 남하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의 국경을 침범하며 통상을 요구하는 일이 잦아지자 김면호는 홍봉주, 이유일 등과 상의하여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에게 방아책(防俄策)을 제의하는 서한을 보내기로 하였다. 이는 당시 조선에서 활동하는 베르뇌(Berneux, S. F) 주교를 비롯한 프랑스 선교사들을 통해 영국과 프랑스의 힘을 빌려 이들로 하여금 러시아의 남진을 견제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이 이를 거절하였고, 홍봉주는 남종삼과 협의하여 다시 방아책을 건의하여 마침내 흥선대원군으로부터 긍정적인 답변을 받아냈다. 이에 김면호는 천주교 신자들끼리 모여 살며 형성한 교우촌을 순회하던 베르뇌 주교를, 이유일은 다블뤼 주교를 서울로 데리고 왔다. 그러는 사이 러시아가 물러갔고, 흥선대원군은 북경(北京)으로 간 사신으로부터 영불연합군이 북경을 함락한 후 양민을 학살하였다는 소식과 청(淸)나라의 천주교 탄압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이에 흥선대원군은 1866년(고종 3) 1월 오히려 베르뇌 주교를 체포하며 조선 천주교회에서 가장 많은 피해자를 낳은 병인박해를 일으켰다. 김면호도 그해 7월 18일 체포되었다.

결국 김면호는 남종삼·홍봉주와 깊이 내통하고 결탁하였다는 죄로 그해 8월 2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김면호의 나이 47세였다.(『고종실록』 3년 8월 1일),[『승정원일기』 고종 3년 8월 1일],[『승정원일기』 고종 3년 8월 2일]

참고문헌

  • 『고종실록(高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우포도청등록(右捕盜廳謄錄)』
  • 『치명일기(致命日記)』
  •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2,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