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악사(冠嶽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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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령대군의 원찰로, 경기도 과천시 중앙동관악산 연주봉(戀主峯)에 있는 절.

개설

관악사(冠嶽寺)는 신라시대 승려 의상이 창건한 사찰이다. 연주암이라고도 한다. 1392년(태조 1) 이성계(李成桂)가 의상대를 중건하였는데, 그의 처남인 강득룡(康得龍)이 연주대라고 불렀다. 조선 건국 이후 불교가 쇠퇴하면서 절 역시 쇠락해졌다. 이 절의 주지가 도성을 출입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투옥된 일이 있었는데, 이는 조선 정부의 불교계에 대한 탄압의 결과였다.

내용 및 특징

677년 의상이 창건하여 관악사라고 했다고 하며, 1392년(태조 1) 이성계가 중건하였다. 그러나 이성계의 처남 강득룡과 고려후기의 문신인 서견(徐甄)·남을진(南乙珍) 등이 이곳에서 고려의 도성이었던 송도(松都)를 바라보며 고려 왕조를 연모하면서 통곡하였기 때문에 연주대라는 이름이 붙었다.

1396년(태조 5)에는 연주암을 새로 지었고, 1411년(태종 11)에는 태종의 둘째 아들 효령대군(孝寧大君)이 지금의 자리에 옮겨서 중건하였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훗날 세종이 되는 충녕대군(忠寧大君)에게 왕위를 물려주려는 아버지 태종의 뜻을 알게 된 효령대군이 형인 양녕대군(讓寧大君)과 유랑 길에 올랐다가 왕궁이 내려다보이는 이곳에 머물렀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효령대군은 절을 지금의 자리로 옮겼고, 사람들은 왕궁을 연모했던 두 왕자의 심경을 기리면서 이곳을 연주암(戀主庵)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1550년(명종 5) 관악사의 승려 계은(戒誾)이 궁궐에 들어 와 왕에게 호랑이 가죽을 바치자 명종이 상을 내릴 것을 명한 일이 있었다(『명종실록』 5년 10월 17일). 이 일을 두고 사간원에서는 요사스러운 승려가 바친 물건을 귀하게 여겨서는 안 되므로 물건을 돌려주라고 청하였다. 병조에서는 계은이 승려의 도성 출입을 금한 법을 어긴 데 대한 벌을 주라고 청하였다. 이에 명종은 이미 병조에서 계은을 옥에 가두었으니 소란스럽게 할 필요가 없고, 호랑이 가죽은 돌려주라고 명을 내렸다(『명종실록』 5년 10월 21일).

이후 관악사는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1868년(고종 5)에는 명성황후(明成皇后)의 하사금으로 극락전과 용화전(龍華殿)을 중수하였고, 1886년(고종 23)에도 명성황후의 하사금으로 전각과 요사를 중수하였다.

참고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권상로, 『한국사찰전서』, 동국대학교출판부, 1979.
  • 김영태, 『한국불교사』, 경서원, 2008.
  • 이능화, 『조선불교통사』, 신문관, 1918.
  • 한우근, 『유교정치와 불교』, 일조각, 1993.
  • 진성규, 「조선초기 유학자의 불교인식 - 조선왕조실록을 중심으로」, 『백산학보』제73호, 백산학회, 2005.
  • 한상설, 「조선초기 세종·세조의 불교신앙과 신권 견제」, 동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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