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왈광(姜曰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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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6년 명나라 사신단의 대표로 조선을 방문하였던 관료.

개설

강왈광은 1619년 진사에 급제하였고, 한림원 편사가 되었다. 1626년 조선에 사신으로 다녀온 후, 1627년 동림당(東林黨)으로 몰려 관직을 삭탈당하였으나 곧 복귀하였다. 1644년 이자성(李自成)의 남경 점령으로 숭정제가 자결하자, 명의 잔존 세력인 복왕(福王) 정권에 몸담기도 하였으나 낙향하였다. 1648년 강서 남창에서 일어난 반군에 가담하였으나 청군에 함락된 후, 절명사(絶命詞)를 남기고 못에 몸을 던져 자결하였다.

활동 사항

강왈광은 1621년 명나라의 요동도사(遼東都司)였던 모문룡(毛文龍)이 후금(後金)에 쫓겨 조선의 철산(鐵山)과 선천(宣川) 지역에 주둔하자, 명나라는 가도(椵島)에 도독부(都督府)를 설치하고 모문룡을 도독으로 임명하였다. 모문룡은 1623년 인조반정 직후 인조가 명 조정의 승인을 받는 일에 관여하였다. 이를 기화로 조선 측에 과대한 군량 공급 등 무리한 요구를 지속하였고, 휘하 장군의 여러 폐단 등이 발생하였다.

한림원 편수이던 강왈광은 1626년 명의 황태자 탄생을 알리는 조서 전달의 임무를 맡아 사신단의 정사(正使)로 조선에 파견되었다. 명 조정은 모문룡 문제로 인하여 조선이 후금 쪽으로 돌아설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고 있었다. 이 사절단은 가도에 주둔하고 있던 모문룡 군대의 상황을 파악하고 통제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당시 명나라는 후금에게 요동지방을 빼앗긴 상황이었다. 따라서 이 사절단은 전통적인 육로를 통한 방식이 아닌 산동성 묘도(廟島)-평안도 가도(椵島) 해로와 조선 서북 해안의 육로를 이용하여 한성으로 들어왔다. 사절단은 6월 13일 한성에 입성하여 조서를 반포하고 인목대비의 국상에 조문한 뒤, 6월 21일에 왔던 길을 따라 귀국길에 올랐다. 강왈광은 사행을 마치고 『유헌기사(輶軒紀事)』를 지어 여행 과정과 모문룡 군대 및 해당 지역의 정황, 조선에서 일어난 사건 등을 자세히 기록하였다.

강왈광은 조선으로 오가는 길에 두 차례 모문룡을 만나 후금을 견제한 내용이 무엇인지 힐문하며 향후의 계획을 밝히도록 요구하였다. 또한 조선에 피해를 끼치지 말라는 명 조정의 뜻을 전하였다.

조선에서는 1626년 2월 사은사(謝恩使)박정현(朴鼎賢)·정운호(鄭雲湖)를 통하여 한림원 편수관강왈광과 공부(工部) 급사중(給事中)왕몽윤(王夢尹)이 이미 차출되어 봄이 된 뒤에 출발한다는 사실(『인조실록』 4년 2월 23일)을 파악하고 있었다. 강왈광 일행은 같은 해 6월 인조에게 칙서를 반포하고 왕과 비에게 비단 폐백인 채폐(綵幣)와 무늬비단인 문금(文錦)을 수여하였다[『인조실록』 4년 6월 13일 갑신 4번째기사]. 당시 인조는 어머니 인헌왕후(仁獻王后) 상중이었기 때문에, 모화관(慕華館)에서 열린 조서를 전달하는 의식 때 흰옷(素服)을 입고 있었다. 이에 대하여 강왈광은 조정의 경사는 공적인 일이고, 나라의 상사(喪事)는 사적인 일이라는 논리로 환복을 요구하였다. 양측의 의례 논쟁 끝에 인조는 결국 조복(朝服)으로 환복하고 의식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이외에도 몇 차례 예법과 관련된 의례를 지적하고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켰다. 강왈광의 이러한 태도는 조선이 예의(禮儀)와 문사(文事)의 나라이며 기자(箕子)의 후예로서 중국과 같은 제도, 문물을 가진 국가라는 인식에 기반하고 있었다. 또한 후금에 대한 조선의 입장을 항상 의심하던 명나라가 조선을 견제하는 방식이기도 하였다.

강왈광은 이전에 파견되었던 사신과는 달리 청렴하였다. 기존 명 사신단의 과도한 요구가 불러일으키는 폐단, 그리고 함께 수행하였던 상인이나 모리배들이 사신을 빙자하여 작폐를 일삼는 것에 대하여 엄금하고 실천하였다. 예컨대 조선 조정에서 보낸 원접사(遠接使)이조 판서김류(金瑬)가 올리는 예물과 연회 등을 거절하였고, 이후에도 한양으로 이동하는 도중 조선 조정에서 올려 보낸 예물들을 거절하였다. 한양에서의 일정 중에서도 인조가 여러 차례 예물을 전하려 하였으나 강력하게 거절하였다. 강왈광의 이러한 태도는 많은 백성들의 호응을 받았다. 귀국길에 오르기 위하여 한양을 떠날 때 도성 백성들이 길을 막고 그의 덕을 칭송하였는데, 그 숫자가 거의 15,000∼16,000명에 이르렀다고 하였다(『인조실록』 4년 6월 21일).

저술 및 작품

『유헌기사(輶軒紀事)』, 『석정산방문집(石井山房文集)』, 『황화집(皇華集)』, 『석정산방어록(石井山房語錄)』, 『과강칠사(過江七事)』

상훈 및 추모

그의 청렴함을 칭송하기 위하여 조선 사람들이 개성에 강왈광의 생사(生祠), 즉 공덕 있는 이를 사모하여 생존 중에 제사 지내는 사당을 지었다.

참고문헌

  • 김한규, 『사조선록(使朝鮮錄) 연구: 송, 명, 청 시대 조선 사행록의 사료적 가치』, 서강대학교 출판부, 2011.
  • 張撝之·沈起煒·劉德重 主編, 『中國歷代人名大辭典』 上·下, 上海古籍出版社, 1999.
  • 송미령, 「명사(明使) 강왈광의 조선 사행」, 『동국사학』 57, 동국사학회, 2014.
  • 한명기, 「17세기 초 명사(明使)의 서울 방문 연구- 강왈광의 『유헌기사』를 중심으로」, 『서울학연구』 8,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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