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랑조성도감(行廊造成都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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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종대 도성 안에 행랑을 조성하기 위해 설치한 임시 관청.

개설

행랑조성도감은 1412년(태종 12)에서 1414년 동안 3차에 걸친 행랑 공사를 담당하기 위해 설치한 임시 관청이다. 세 차례의 행랑 공사를 통해 총 2,027칸이 건설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태종대 행랑 건설은 상업 정책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태종은 지폐인 저화(楮貨)를 통용하도록 하기 위해, 1410년 추포(麤布) 사용을 금지하고 각 도에서 세금으로 내는 포(布)를 저화로 내게 하는 등의 강력한 조치들을 연이어 실시하였다. 그러나 저화의 통용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좌정승(左政丞)성석린(成石璘) 등이 행랑을 건설하자는 의견을 냈고, 이것이 실천되었다.

행랑 건설 전에 먼저 도성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하천의 물길이 정비되었다. 개천도감을 설치하여 1412년 1월부터 2월까지 약 한 달 동안 개천 공사를 하였다. 개천 공사가 거의 완료될 무렵인 1412년 2월 10일에는 혜정교(惠政橋)부터 창덕궁 동구(洞口)까지 시전 행랑터를 조성하였다. 개천 공사 완료 후에는 개천도감을 행랑조성도감으로 전환하여 행랑 조성에 곧바로 착수하였다.

원래 행랑 조성은 이를 통해 상인층들을 통제하고 절도 등의 범죄를 방지하려는 목적에서 출발하였다. 그러나 혜정교에서 창덕궁 동구 구간을 건설하려던 초기 계획과는 달리 1차 행랑 조성 때에는 창덕궁 궐문부터 정선방 동구까지 472칸을 완성하였다. 이 행랑은 관청을 위한 조방(朝房)으로 사용하게 하였으며,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敦化門)도 이때 건설하였다. 이렇게 방향이 달라진 데에는 행랑 조성을 위해 준비한 물자와 인원이 1412년 경복궁에 경회루를 건설하는 데 투입되었기 때문이었다.

원래의 계획 구간인 혜정교에서 창덕궁 동구 구간은 1413년 2차 공사 때 완성되었다. 1414년에는 3차로 종루에서 남대문까지와 종묘 앞에서 동대문까지의 행랑이 추가로 건설되었다.

행랑을 조성할 때 파괴된 민가에 대해서는 저화로 보상해 주었다. 총 1,486칸 가운데 기와집 126칸은 1칸당 저화 20장씩, 초가 1,360칸은 1칸당 10장씩 지급하여 총 16,120장을 지급하였다.

조직 및 역할

행랑조성도감은 개천도감이 그대로 전환되었다는 점에서 개천도감의 제조 등의 조직이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개천도감은 윤12월 처음 설치된 당시에는 성산군(星山君)이직(李稷)·공조 판서박자청(朴子靑)·지의정부사이응(李膺) 등 3명을 제조로 삼았다. 1월 공사 시작 전에는 남성군(南城君)홍서(洪恕)·화성군(花城君)장사정(張思靖)·희천군(熙川君)김우(金宇)·총제(摠制)김중보(金重寶)·유습(柳濕)·이지실(李之實)·김만수(金萬壽)·유은지(柳殷之)·이안우(李安愚)·황녹(黃祿) 등 10명을 추가로 제조로 삼았다. 제조 아래에는 사(使)와 판관(判官)이 있었는데, 이 역시 1월에 33명을 증원하였다.

2차와 3차 공사 때에는 담당자가 변하였다. 2차 공사의 경우 성산군이직·공조 판서박자청·지의정부사이응 등 3명이 영솔하고 전 판사(判事)이간(李暕) 등 22인이 감역의 일을 맡았다. 이 외에도 감역관(監役官)이 여러 명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목수(木手)·석수(石手)·노야장(爐冶匠) 등 숙련 공장(工匠)이 동원되었다.

2차 공사와 3차 공사 때는 행랑조성도감의 참여 인원도 변화하였다. 1차 행랑 조성 때 동원한 인원은 총 2,035명이었다. 그 가운데 승군(僧軍)이 500명으로 2월부터 4월까지 부역하고 돌아갔으며, 7월에 다시 승군 1천 명, 목공 200명을 동원하여 단청 등 추가 작업을 하였다. 1413년 2차 행랑 조성 당시에는 풍저창(豊儲倉), 군자고(軍資庫) 등 여러 공역이 함께 이루어졌다. 이때는 대장(隊長), 대부(隊副), 군기감(軍器監)별군(別軍), 각(各) 사(司) 하전(下典) 등 2,141명의 역정(役丁)과 500명의 승군 등 2,641명을 동원하였다. 1414년 3차 행랑 조성 때에는 박자청이 감독을 맡고 양계(兩界)와 각 도의 승군 600명, 경기·풍해도(豐海道)의 선군(船軍) 1천 명을 징발하여 공역을 진행하였다.

변천

1414년 3차 행랑 조성 이후로 일부 행랑이 무너져 감역관이 처벌받았다. 1415년 여름에는 폭풍우로 숭례문 안과 흥복사문(興福寺門) 남행랑 등이 무너져 병조 판서박신(朴信)·전 이조 판서황희(黃喜)를 행랑도감 제조로 삼아 행랑을 고쳐 짓게 하였다. 이때 역군으로는 화통군(火㷁軍) 400명, 사재감(司宰監) 수군 100명, 의금부의 번상(番上)한 도부외(都府外) 50명, 보충군(補充軍) 50명 등과 선공감(繕工監)의 목수·석수·노야장 등을 동원하여 충당하였다. 이처럼 행랑 등의 건축물 보수를 위해 1417년 무렵까지는 행랑도감이 간간이 설치되다가 그 이후로는 폐지된 것으로 추정된다. 태종대에 조성한 행랑의 규모는 성종대 약간 확장되었을 뿐 큰 틀에서는 변화 없이 조선후기까지 유지되었다.

참고문헌

  • 정옥자 외, 『조선시대 문화사 上: 문물의 정비와 왕실문화』, 일지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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