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관회(八關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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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천령(天靈)과 오악(五嶽), 명산대천(名山大川)과 용신(龍神) 등에 대한 불교식 제사 의례.

개설

팔관회(八關會)는 인도에서 유래하여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진흥왕대에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토속신을 위한 제사를 봉행하며 왕실과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였다. 고려시대에 성행하여 국가적인 제사 의식이 되었다. 고려태조는 팔관회를 ‘부처를 공양하고 귀신을 즐겁게 하는 모임’이라 하였고, 또 ‘천령과 오악, 명산, 산천, 용신을 섬기는 것’이라 표현하기도 하였다. 신라시대에는 전사자를 위령하고 나라의 평안을 기원하는 등의 제의적(祭儀的) 의식이었지만 고려시대에는 신앙과 제사, 놀이 등이 융합된 국가적인 축제로 변모하였다. 고려의 팔관회는 고려 왕조에 대한 충성과 고려라는 국가에 대한 일체감을 불러일으키는 대중적인 축제였기 때문에, 조선이 건국된 직후인 1392년(태조 1)에 폐지되었다.

연원 및 변천

팔관회는 인도의 팔재계(八齋戒) 의례에서 유래하였다. 인도에서는 육재일(六齋日) 즉 매월 8일, 14일, 15일, 23일, 29일, 30일은 악귀가 사람들을 쫓아다니면서 목숨을 빼앗고 병에 걸리게 하는 불길한 날이라고 여겼다. 그런 까닭에 이 날에는 목욕하고 단식하며 착한 일을 행하여 흉사를 피하려 하였다. 즉 액막이 풍속이었는데, 이후 불교에 유입되어 재가신도들이 팔계(八戒)를 되새기며 지키는 날이 되었다. 팔계는 오계와 삼계가 합쳐진 것으로, 오계는 살생하지 말 것, 도둑질하지 말 것, 간음하지 말 것, 헛된 말을 하지 말 것, 음주하지 말 것 등이고, 삼계는 가무를 즐기지 말 것, 사치스러운 침상을 쓰지 말 것, 때가 아니면 먹지 말 것 등의 내용이다.

중국에 불교가 전래되면서 팔관회 의례도 전해졌다. 이미 3세기 후반에는 중국 불교에 팔계 즉 팔재계가 널리 알려져 있었고, 팔관회도 시행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팔관회는 문헌에 따라 팔관재(八關齋), 팔관계(八關戒), 팔재(八齋)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렸는데, 5세기 중엽에 『불설팔관재경(佛說八關齋經)』이 등장하면서 팔관재라는 이름으로 본격적으로 유행하였다. 중국의 팔관재는 불교의 종교 의례와 도교의 민속 신앙적 요소가 결합하여, 장수, 치병, 재액 퇴치 등 다양한 현실적 기원을 목적으로 개최되었다.

우리나라의 팔관회는 신라시대에 시작되었다. 고구려에서 귀순한 혜량(惠亮)이 551년(신라 진흥왕 12)에 처음 팔관회를 개설하였고, 602년(신라 진흥왕 33)에는 전쟁에서 죽은 군사들을 위해 팔관연회(八關筵會)를 7일 동안 베풀었다. 636년(신라 선덕왕 5)에는 자장(慈藏)이 중국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의 감응을 받았는데, 황룡사에 구층탑을 세운 뒤 팔관회를 베풀고 죄인을 놓아주면 외적이 침입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한편 화랑의 세속오계에도 팔관회와 관련한 내용이 보인다. 원광(圓光)은 화랑도에게 살생유택의 의미를 가르치면서, 육재일과 봄·여름철에는 살생을 하지 않는데 이는 때를 가리는 것이라고 하였다. 신라의 팔관회 전통은 이후에도 이어졌는데, 궁예는 898년부터 917년까지 20년 동안 매년 개설하였다.

고려시대에는 팔관회가 국가적인 차원에서 성행하기 시작하였다. 918년(태조 1) 11월에 위봉루(威鳳樓)에서 개설된 이래, 매년 개최되는 국가의 정기 의례로 자리 잡았다. 특히 태조는 「훈요(訓要)」를 내려, 후세에 간신들이 연등회와 팔관회의 가감을 건의하는 행위를 절대 금지하라며 팔관회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이후 팔관회는 고려시대 전 기간에 걸쳐 120회나 개설되었다.

그러나 1392년(태조 1)에 조선이 건국되면서 팔관회는 전격 중지되었고(『태조실록』 1년 8월 5일), 이후 더 이상 개설되지 못하였다. 이는 팔관회가 단순한 불교 행사를 넘어 고려 왕조에 대한 충성과 고려라는 국가에 대한 일체감을 불러일으키는 대중적인 축제였기 때문이다. 조선의 건국 주체들은 건국 직후 팔관회를 사치스러운 불교 행사로 지목해 단번에 폐지시켰는데, 이는 고려의 대표적인 불교 의식을 유지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절차 및 내용

고려시대의 팔관회는 매년 두 차례 개설되었다. 서경에서는 10월 14일과 15일, 개경에서는 11월 14일과 15일에 개최되었다. 14일은 소회일(小會日), 15일은 대회일(大會日)이라고 하였다. 소회일에는 왕이 법왕사에 행차하여 불전에 공양하고 선왕(先王)의 위패에 예를 올렸다. 고려중기의 문인인 이규보(李奎報)는 「법왕사팔관설경문(法王寺八關說經文)」을 지어, 법왕사에서 경전을 강설하는 모습을 설명하기도 하였다. 대회일에는 구정(毬庭)에서 군신과 외국 사신의 하례 의식 등이 진행되었다. 이틀간의 의례 절차를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① 왕이 법왕사로 행차한다[法王寺幸香]. ② 왕이 의봉루에 이른다[鑾駕出宮]. ③ 의봉루에 오른 왕이 태조에게 제를 올린다[太祖眞酌獻]. ④ 왕이 자리를 잡은 뒤 군신 간에 하례 의식을 진행한다[坐殿受賀]. ⑤ 지방의 관리들이 팔관회를 경축하는 봉표를 왕에게 올린다[封表朝賀]. ⑥ 외국인들이 왕에게 하례를 올린다[外國人朝賀]. ⑦ 문장가들이 팔관회와 왕을 칭송하는 팔관치어를 올린다[八關致語朝賀]. ⑧ 술과 음식을 나누며 가무백희(歌舞百戱)를 즐긴다[歌舞百戱].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팔관회의 의식 절차는 크게 왕과 신하 간의 의례와 무대 공연으로 구분할 수 있다. 군신 간에 하례를 행하는 좌전수하(坐殿受賀) 등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의식이고, 가무백희는 전통적·종교적 요소와 예술 및 놀이의 성격이 융합된 문화 축제라 할 수 있다. 팔관회에 관한 연구자들은 공통적으로 그 개설 목적과 취지를 ‘국가적·정치적’이라고 한다. 즉 왕의 권위를 강화하려는 호국 의례로서, 왕권을 신성화하고 계급 사회의 위계와 질서를 확인하려는 목적이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팔관회가 고려시대 전 시기에 걸쳐 시행될 수 있었던 원동력은 가무백희의 존재였다. 가무백희는 팔관회가 국가의 공식 의례이자 백성이 함께 참여하는 축제로서의 성격도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중요한 요소이다. 팔관회는 조선 건국 이후 더 이상 개설되지 못하였으나, 오늘날에는 2000년부터 부산 불교계를 중심으로 이를 복원·재현하려는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

참고문헌

  • 김상현 등, 『팔관회의 복원과 현대적 계승』,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세미나자료집, 동국대학교, 2012.
  • 김종명, 『한국 중세의 불교의례』, 문학과지성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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