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성(中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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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 하늘 자오선에 남중(南中)하는 별.

개설

남쪽 하늘 자오선 위에 위치하는 것을 남중이라 하며, 중성(中星)이란 남중하는 별이라는 뜻이다. 조선시대에는 특히, 이십사절기(二十四節氣) 시각이 들어 있는 날짜에 혼각(昏刻)과 효각(曉刻)에 남중하는 별을 시간의 기준으로 삼았고, 이것을 표로 나타내 정리한 책을 『중성기(中星紀)』 또는 『중성기(中星記)』라고 하였다. 여기서 혼각과 효각은 오늘날의 박명 시각과 비슷한 개념인데, 1654년 이전에는 하루를 100각(刻)으로 나누어 해가 진 뒤 2.5각이 되는 시각을 혼각이라 하고, 해가 뜨기 전 2.5각을 효각이라고 하였다. 또한 혼각과 효각 사이를 야분(夜分)이라고 하며, 이 시간을 5등분하여 각각 1경(更), 2경, 3경, 4경, 5경이라고 하였다. 조선시대 『중성기』에는 매 경이 되는 시각에 남중하는 시간권이 어떤 이십팔수(二十八宿)에 들어가며 그 수거성(宿距星)과 몇 도의 적경 차이가 있는지를 계산하여 표로 작성해 놓았다. 그러므로 『중성기』에는 어떤 절기 무렵 밤 시각에 어떤 별이 남중하는지를 측정하여 시간을 정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의 시각제도는 낮에는 앙부일구(仰釜日晷), 소간의(小簡儀),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등을 사용하여 해의 위치를 관측하여 시간을 정하고, 밤에는 기본적으로 물시계를 사용하여 시간을 측정하였다. 그러나 물시계는 오차가 발생하므로 이때 중성을 관측하고 그 관측 결과를 『중성기』로 분석하여 따로 시간을 정함으로써 물시계의 오차를 보정하면서 시각제도를 운영했다.

내용 및 특징

『중성기(中星紀)』 또는 『중성기(中星記)』는 조선초기인 1396년(태조 5) 12월에 류방택(柳方澤)이 계산한 『중성기』가 새로 석각된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에 포함되었다. 1423년(세종 5)에 문신들로 하여금 고려 때 사용하던 선명력(宣明曆)과 고려말인 1309년에 도입된 수시력(授時曆)에 들어 있는 중성 계산법을 정리하도록 하였다(『세종실록』 5년 2월 10일). 즉, 이때까지도 새로 들어온 『수시력』에 따라 중성을 계산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성을 계산하기 위해서는 태양의 위치를 계산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때까지는 겨우 역일 즉 날짜 계산법을 터득한 정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1434년(세종 16)에 장영실(蔣英實)이 보루각(報漏閣) 자격루(自擊漏)를 완성하여 보다 정밀하게 밤 시각을 측정할 수 있게 되었으며, 1437년(세종 19)에는 일성정시의 등이 완성되어 밤의 시각을 더욱 정밀하게 측정하게 되었다. 세종 때 수시력을 기본으로 개발된 『칠정산내편』에도 중성을 계산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이때 수립된 시각 측정 제도는 그 후 계속 운용되었다. 성종 때의 기록에 따르면, 낮에 소간의로 해를 관측하여 거기에 새겨져 있는 백각환(百刻環) 눈금을 읽어서 시간을 측정하고, 밤에는 중성을 관측하여 시각을 정한다는 설명이 나온다(『성종실록』 21년 12월 5일).

중종 때는 자격루를 하나 더 제작하여 창덕궁에도 설치하였는데, 앙부일구로 측정하는 시각과 새로 만든 자격루로 측정한 시각이 차이가 없었다(『중종실록』 31년 6월 28일)(『중종실록』 31년 8월 20일). 그러나 이렇게 측정된 시각은 중성을 관측하여 구한 시각과 비교해야만 절후(節候)를 알 수 있기 때문에 두세 명의 천문학자들로 하여금 2년에 걸쳐 중성을 관측하게 하였다(『명종실록』 5년 6월 24일).

그런데 지구 자전축의 세차운동 때문에 별의 적경과 적위의 수치가 변하고, 이에 따라 중성의 남중 시각도 조금씩 변한다. 따라서 수백 년이 지나면 중성을 새로 계산하거나 관측해야만 한다. 이에 따라 인조 때에는 중성을 새로 계산하거나 측정해야 했다. 그래서 관상감에서 새로 계산해서 기록해놓은 『중성기』를 1년 동안 실제로 관측한 결과와 비교해보았다(『인조실록』 9년 12월 27일).

1654년부터 조선은 시헌력법(時憲曆法)을 채용하였는데(『효종실록』 4년 1월 6일), 이 새로운 역법은 중국에 와서 활약하던 예수회 선교사들에 의해 서양 천문학 지식을 적용하여 작성된 것이다. 기존의 대통력법(大統曆法) 또는 『칠정산(七政算)』에서는 하루를 100각으로 나누고 원주는 365.25일이었는데, 새로 도입한 시헌력법에서는 하루를 96각으로 나누었고, 원주를 360도로 나누었다. 또한 혼각과 효각의 정의가 바뀌었다. 즉, 해가 지평선에서 수직으로 18도 아래에 위치하는 순간을 혼각과 효각으로 정의했다.

숙종 때에는 이미 시헌력을 시행하고 있었지만 시각제도는 여전히 기존의 대통력법에 따라 운용하고 있어서 심한 오차가 발생하였다(『숙종실록』 44년 6월 13일). 영조 때에 이르러 청나라로부터 시헌력법에 의한 중성 계산법을 습득하고자 오랫동안 노력했다. 그래서 중국에서 서적을 구입해 오고 계산법도 공부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지만, 1744년(영조 20)까지도 중성 계산법을 모르고 단지 물시계에만 의존하여 밤 시각을 측정하고 있었다(『영조실록』 20년 6월 25일).

1754년(영조 30)에 이르러 안국빈(安國賓), 김태서(金兌瑞) 등이 청나라에서 역법서인 『신법중성기(新法中星記)』와 『오야배시법(五夜排時法)』을 구해 와서 이를 연구하여 『누주통의(漏籌通義)』를 저술하였다(『영조실록』 30년 윤4월 17일). 그러나 이때 안국빈이 저술한 『누주통의』는 부정확한 것으로 구면기하학과 삼각함수 등을 사용해야 제대로 계산할 수 있었다.

그 후 정조(正祖)의 친부인 사도세자의 능침을 수원으로 이장하는 데 길한 하관 시각을 점쳐보니 밤이었다. 그래서 그 정확한 시각에 제대로 맞추어 하관해야 했으나, 중성 관측으로 시각을 정확히 측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영의정 김익(金熤)이 비록 관상감 천문학자는 아니었지만 수학과 역법 계산에 뛰어났던 김영(金泳)을 추천하여 신법지평일구(新法地平日晷)라는 새로운 방식의 해시계를 제작하고 『신법중성기』와 『신법누주통의(新法漏籌通義)』를 개발하여 사도세자의 능침을 무사히 이장할 수 있었다(『정조실록』 13년 8월 21일). 신법지평일구나 『신법중성기』 등을 만들기 위해서는 구면기하학과 삼각함수 등을 동원하여 제대로 계산할 수 있어야 하므로, 이때에 이르러야 조선은 『시헌력』과 일치하는 정확한 『신법중성기』를 갖게 되었다.

참고문헌

  • 남문현, 『장영실과 자격루』,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2.
  • 안상현, 「김영(金泳)과 1792년에 출간된 새로운 『보천가(步天歌)』」, 『천문학논총』26, 147~157쪽, 2011.
  • 안상현, 「1792년 관상감이 출간한 새로운 『보천가(步天歌)』의 기원」, 『한국과학사학회지』37, 175~198쪽, 2015.
  • 한영호, 「조선의 경루법(更漏法)」, 『동방학지』143, 167~218쪽,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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