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묘(宗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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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역대의 왕과 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왕가의 사당.

개설

태묘(太廟)라고도 한다. 역대 왕과 왕비의 국상이 끝나면 신주를 종묘(宗廟)에 봉안하였다. 이를 부묘(祔廟)라고 한다. 한편 시간이 경과하면서 세실(世室)로 정해진 왕의 신주는 그대로 종묘의 정전에 보관하되, 그렇지 못한 왕은 제사를 지내는 대수를 자나면 영녕전(永寧殿)으로 옮겼다. 이때 행해지는 의식이 종묘조천의(宗廟祧遷儀)이다.

종묘 정전 남문을 들어서면 하월대(下月臺) 동쪽에 공신당(功臣堂), 하월대 서쪽에 칠사(七祀)의 신주를 모신 칠사당(七祀堂)이 있고 곧바로 정전에 이른다. 정전의 서문을 나서면 영녕전의 동문과 이어지고, 영녕전에는 정전과 같이 서문·남문·동문이 있다. 영녕전 북동쪽에는 제기고(祭器庫)가 있다.

정전 북동쪽에 전사청(典祀廳)이 있고, 그 주위에 제정(祭井)·판위대(版位臺)·수복방(守僕房)이 있으며, 남동쪽에 재실(齋室)이 있다. 1995년 유네스코에 의해 팔만대장경, 석굴암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정전의 신실은 서쪽을 상(上)으로 하여 제1실에 태조의 신주가 봉안되어 있고, 영녕전은 정중(正中)에 추존조(追尊祖) 4왕을 모시고 서쪽과 동쪽으로 구분하여 서쪽을 상으로 차례대로 모시고 있다. 이것을 소목제도(昭穆制度)라고 한다.

내용 및 특징

종묘는 보통 종묘사직(宗廟社稷)이라고 말할 정도로 조선시대의 가장 중요한 제도로, 성리학적인 이상 사회를 건설하려는 조선의 정신과 문화를 가장 상징적으로 표현한 제도이다. 이는 종묘를 구성하고 있는 정전, 영녕전, 공신당, 칠사당의 내용과 의미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정전은 가묘(家廟)처럼 시조인 태조와 4대 조상을 모시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중국에서 주대(周代)의 이상 사회를 이룬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을 세실로 모셔 영원히 옮기지 않은 것을 본받아, 이상 사회를 이룬 임금을 영원히 옮기지 않고 세실로 모시었다. 즉 종묘에 모신 왕이 4대가 지나 옮길 때가 되면 이상 사회를 이룬 공적의 유무를 판단하여 공적이 있으면 세실로 모시고 계속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이르러 4대가 지나기 전에 이상 사회를 이룬 공적이 있는가를 판단하여 미리 세실로 정하는 제도가 행해졌다. 효종(孝宗)의 경우, 4대가 지나기도 전에 중국에서도 미처 이루지 못한 성인의 공덕을 가진 왕으로 추앙되어 숙종대에 미리 세실로 정해졌다. 조선전기에 4대가 지나 조천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정해지던 세실 제도가 조선후기에는 공덕을 평가해서 4대가 지나기도 전에 미리 세실로 정해지는 제도로 변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효종, 숙종, 영조 등의 성군(聖君)이 잇달아 나왔다. 이후 세도정치 시기에는 본질은 변질되고 형식만 남아 순조처럼 성군이 아닌 경우에도 미리 세실로 정해지기도 하였다. 현재 19실(室)에 19위의 왕과 30위의 왕후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영녕전은 1421년(세종 3)에 태조의 선대 4조인 목조(穆祖), 익조(翼祖), 도조(度祖), 환조(桓祖) 및 종묘의 정전에 봉안되지 않은 조선 역대 왕과 그 비(妃)의 신위(神位)를 모시고자 세웠다. 영녕전의 정전에는 목조·익조·도조·환조를 모시었고, 익실에는 종묘 정전에 모셨다가 4대가 지나 옮겨야 하는 왕들을 모시었다. 현재 정전에서 조천된 15위의 왕과 17위의 왕후, 의민황태자(懿愍皇太子)의 신주가 16실에 모셔져 있다.

고려시대에는 대수가 지난 조상들을 모시는 영녕전이 없어 3년에 한 번 대수가 지난 조상들을 모아서 제사 지내는 협제(祫祭)가 행해지다가 조선시대에 추존한 4대 조상과 대수가 지난 조상들을 영녕전에 모시어 매년 봄가을로 제사 지내면서 협제가 없어졌다. 이를 본받아 일반 사대부 집안에서도 1년에 한 번 시제를 지내는 풍습이 생겼다고 볼 수 있다. 즉 영녕전의 제도로 조상 숭배를 하는 제례가 얼마나 잘 발달했는지 알 수 있다.

공신당은 이윤(伊尹)이나 주공(周公)처럼 임금을 도와 이상 사회를 건설한 신하들을 배향(配享)하는 곳이다. 세종대의 황희(黃喜)·허조(許稠) 등의 정승, 선조대의 퇴계 이황(李滉)·율곡 이이(李珥) 같은 학자, 효종대의 청음 김상헌(金尙憲)·우암 송시열(宋時烈) 같은 명신(名臣) 등 나라에 충성한 신하의 신주 83위가 모셔져 있다.

칠사당은 『예기(禮記)』에 근거하여 왕이 신하와 백성을 위하여 크고 작은 계절의 일곱 소신(小神)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 지내던 사당이다. 인간 생활의 여러 가지 일들을 사찰하고 처벌하는 신을 모신 곳이다. 봄의 사명(司命) 즉 사람의 선악에 따라 응보한 신과 출입을 주관한 신인 호(戶), 여름의 조(竈) 즉 음식의 일을 주관한 신, 가을의 문(門) 즉 문의 출입을 주관한 신과 후사가 없는 제후의 신인 여(厲), 겨울의 행(行) 즉 도로를 주관한 신에 제사 지내고, 계하(季夏) 즉 6월의 토왕일(土旺日)에는 별도로 당이나 실의 거처를 주관한 신인 중류(中霤)에 제사 지낸다.

이처럼 민속이라고 생각했던 여러 소신들에 대한 제사를 종묘의 칠사당에서 지낸 다는 것은 칠사당에서 지내던 제사가 민속으로 되었음을 알 수 있는 좋은 증거이다. 다만 왕실에서는 칠사당처럼 정형화되어 있는 반면 민속에서는 부뚜막이나 장독대 같은 곳에 고사 지내는 풍습으로 변형되었다고 볼 수 있다.

변천

종묘를 구성하고 있는 정전, 영녕전, 공신당, 칠사당은 조선시대의 성리학적인 이상 사회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조선 왕실에서는 이러한 종묘의 모습을 실현하기 위하여 원칙에 어긋났던 점을 바로잡고자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태종이 즉위하면서 성 밖으로 쫓아냈던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貞陵)을 복위하고 신덕왕후의 신주를 종묘에 모신 일, 공정대왕이라고 칭하였던 정종에게 묘호(廟號)를 올린 일, 세조가 파헤쳤던 문종 비 현덕왕후의 능인 소릉(昭陵)을 복위하고 현덕왕후의 신주를 다시 종묘에 모신 일, 세조가 쫓아내 죽이고 노산군으로 강등했던 단종을 복위시켜 종묘에 올린 일, 중종반정 때 강제로 이혼당하여 쫓겨났던 단경왕후를 복위하여 종묘에 모신 일 등은 성리학적인 의리명분론에 입각한 정통론을 회복하는 조처였다. 그러나 성리학 이념에 어긋난 무도한 정치를 하여 쫓겨난 연산군과 광해군은 복위시켜 종묘에 모시지 않았다.

조선후기에는 숙종 비 인현왕후가 왕세자빈과 함께 종묘에 알현하면서,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에 왕비와 왕세자빈이 종묘에 알현하는 의식이 추가되었다. 원래 종묘에는 여자들이 들어갈 수 없었는데 혼례에서 신부가 사당에 가서 조상에게 인사를 올리는 묘현례(廟見禮)가 가장 중요한 의식으로 정착되면서 왕비와 왕세자빈이 종묘에 알현하는 의식이 생겼다.

1897년 고종은 황제로 즉위하자 5대 추존을 하여 종묘 제도를 황제식으로 바꾸었다. 1899년(광무 3) 11월 12일에 사도세자를 장종(莊宗), 혜경궁 홍씨를 헌경왕후(獻敬王后)로 추숭하고, 12월 19일에 5대조인 영조 대신에 태조를 황제로 추존하여 태조고황제로, 4대조인 장종을 장조의황제로, 3대조인 정종을 정조선황제로, 2대조인 순조를 순조숙황제로, 1대조인 익종을 문조익황제로 추존하여 종묘에 모시었다. 그리고 1908년(융희 2) 순종은 진종, 헌종, 철종을 황제로 추존하여 황제식 7묘제를 확립하였다.

종묘 정전과 영녕전은 종묘 제도의 변천에 따라 규모가 커져갔다. 1394년(태조 3) 8월 13일 한양을 새 도읍지로 확정하여, 이듬해 9월 종묘를 조성하면서 정전을 7칸으로 준공하였고, 명종 초에 4칸을 늘려 11칸으로 되었다. 1726년(영조 2)에 다시 4칸을 늘려 15칸으로 되었고, 1836년(헌종 2)에 4칸을 늘려 19칸으로 되었다.

영녕전은 1421년(세종 3)에 태조의 4대조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를 모시는 정전 4칸과 제기들을 두는 동서 협실 2칸으로 준공하였다. 임진왜란 때 불탔다가 선조 말에 복구를 시작하여 1608년(광해군 즉위)에 정전 4칸, 동서 협실 3칸으로 재건하였다. 1667년(현종 8) 동서 협실을 각 1칸씩 늘려 서협실에 정종·문종·단종·덕종을 모시고, 동협실에 예종·인종·명종·원종을 모셨다. 1836년(헌종 2) 다시 동서 협실을 2칸씩 늘려 서협실에 정종·문종·단종·덕종·예종·인종을 모시고, 동협실에 명종·원종·경종·진종을 모셨다.

종묘 제사도 시대에 따라 변천해갔다. 종묘에 드리는 주요 제사로는 체협(禘祫)이라 하여 천자는 5년에 한 번 체제(禘祭)를, 제후는 3년에 한 번 협제(祫祭)를 지냈다. 이 밖에 매년 사계절과 납일(臘日)에 지내는 사시급납향종묘의(四時及臘享宗廟儀), 왕이 직접 종묘에 기원이나 보고를 드리는 친향기고종묘의(親享祈告宗廟儀), 사계절과 납일에 왕이 사람을 시켜서 제사 지내는 사시급납향종묘섭사의(四時及臘享宗廟攝事儀), 명절이나 초하루·보름에 지내는 속절급삭망향종묘의(俗節及朔望享宗廟儀), 새로 나온 곡식이나 물건을 바치고 지내는 천신종묘의(薦新宗廟儀)가 주가 되었다.

그런데 1421년에 목조를 조천하면서 영녕전을 세워 모시고 매년 봄가을로 제사 지내게 되니, 3년에 한 번 조천한 조상을 모두 모시고 지내는 협제를 지낼 필요가 없어졌다. 이에 따라 고려시대에는 없던 춘추향영녕전의(春秋享永寧殿儀)가 『세종실록』 「오례」에 처음 생겨 『국조오례의』에서 정식 제사가 되었다.

조선후기 숙종대에는 가례를 올린 후에 묘현의(廟見儀)라 하여 왕비와 왕세자빈이 종묘와 영녕전을 배알하는 의식이 행해졌다. 원래 여자는 종묘에 출입할 수 없었는데 묘현의를 시행하느라 숙종 비 인현왕후와 당시 왕세자빈이 처음 종묘에 알현을 행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에 따라 『국조속오례의』에는 왕비알종묘영녕전의(王妃謁宗廟永寧殿儀), 왕세자빈알종묘영녕전의(王世子嬪謁宗廟永寧殿儀)가 생겼다. 이로써 왕세자·왕세제·왕세손, 왕세자빈·왕세제빈·왕세손빈이 종묘와 영녕전을 배알하는 의식 등이 생겼다.

종묘 제사는 임금의 참석 여부에 따라 친향(親享)과 섭사(攝祀)로 구분되고, 시기에 따라 사시와 납일에 지내는 제사인 속절과 초하루와 보름 즉 삭망에 지내는 제사가 있다. 고려시대 종묘 제사는 한식일, 납일, 춘하추동 사계절 첫 달 등 모두 6차례에 걸쳐 시행되었고, 이와 별도로 3년에 한 번씩 협제를, 5년에 한 번씩 체제를 시행하였다.

『세종실록』 「오례」에는 체제는 빠지고 협제만 지냈으며, 삭망이 추가되었다. 『국조오례의』에는 협제는 없어지고 속절이 추가되어 속절급삭망 때 제사지냈다. 또 왕비와 왕세자빈이 종묘에 알현하는 의식이 추가되었다.

의의

종묘는 성리학적인 이상 사회를 건설하려는 조선시대의 정신과 문화를 가장 상징적으로 표현한 제도로, 이상 사회를 이루는 데 공헌한 왕과 그렇지 못한 왕을 구별하여 온 나라에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였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왕은 노약자가 편히 사는 성리학적인 이상 사회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였고, 이상 사회를 만든 중국의 상징적 왕인 요순(堯舜)을 본받고자 하였다.

세종대왕은 요순처럼 조선을 이상 사회로 만든 대표적인 왕이었다. 영조와 정조대의 문예부흥은 성리학적인 이상 사회와 닿아 있다. 종묘는 바로 성인 같은 왕들을 모셔 행적을 본받고 공덕에 감사하고자 제사 지내는 곳이며, 왕들을 보좌하여 이상 사회를 건설한 신하를 배향하는 곳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날 종묘에서 노약자가 편히 사는 이상 사회를 건설하는 데 바탕이 되는 정신과 문화를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 『대전회통(大典會通)』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
  •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
  • 『춘관통고(春官通考)』
  • 『대한예전(大韓禮典)』
  • 국립민속박물관, 『한국의 제사』, 국가기록원, 2003.
  • 문화재청, 『조선왕조 종묘와 제례』, 국가기록원, 2002.
  • 이현진, 『조선후기 종묘전례연구』, 일지사, 2008.
  • 지두환, 『종묘이야기』, 집문당, 2005.
  • 『한국역사용어시소러스』, 국사편찬위원회, http://thesaurus.histor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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