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거지반역(李仁居之叛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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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7년 9월 강원도 횡성에서 이인거가 주도하여 일으킨 반란.

개설

1627년(인조 5) 9월, 강원도 횡성의 사림 이인거(李仁居)가 후금과의 화친에 불만을 품고 일으킨 반란이다. 주화파의 처단, 후금 소탕 등을 명분으로 봉기하였으나,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한 채 진압되고 말았다.

역사적 배경

임진왜란 당시 명(明) 나라의 지원은 명에 대한 사대(事大)와 의리(義理)를 절대 불변의 당위로 인식하는 조선 사대부들의 의식을 더욱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대명사대(對明事大)나 대명의리(對明義理)는 조선 내에서 어느 정파(政派)나 개인을 막론하고 모두에게 부정할 수 없는 보편적 가치로 인식되고 있었다. 따라서 인조반정의 주도 세력도 당시 조선 사대부들의 가장 보편적인 정서를 자극하는 ‘배명친후금(背明親後金)’ 외교를 거병의 명분 중 하나로 제기하였던 것이다.

이인거의 본관은 영천(永川)으로, 명종대 홍문관 교리(校理)를 지낸 이추(李樞)의 손자이다. 광해군대에 한양에서 횡성(橫城)으로 이주하여 경작에 힘쓰며 살았다. 1626년(인조 4) 2월 인조에게 올린 상소를 계기로 세자익위사 익찬(翊贊)에 제수되었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는 않았다. 인근에 덕행이 높은 선비로 이름이 났다. 1628년(인조 6) 1월, 인성군(仁城君) 이공(李珙)을 옹립하는 반란을 모의하다가 처형된 유효립(柳孝立)과도 긴밀히 연락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유효립은 광해군 정권의 실세로 광해군의 처남이기도 하였던 유희분(柳希奮)의 조카였다. 이인거는 정묘화약(丁卯和約)을 통해 인조정권이 후금과 화의(和議)을 맺은 것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모의하게 되었다.

발단

1627년 10월 1일, 횡성 유학(幼學) 진극일(陳克一)은 이인거가 9월 29일 무단으로 군사를 일으켜 횡성현의 군기(軍器)를 탈취한 뒤 창의중흥대장(倡義中興大將)이라 자칭하며 한양을 공격하려 한다는 사실을 조정에 알려 왔다(『인조실록』 5년 10월 1일). 이인거는 거병 며칠 전 강원감사최현(崔晛)을 만나 조정에 올리는 상소를 전달하였다. 그 개요는 후금과의 화친으로 예의의 나라가 하루아침에 금수의 나라로 전락하였음을 개탄함과 동시에 자신에게 병권을 주면 화친을 주장한 매국의 간신(奸臣) 최명길을 목 벤 다음 서쪽으로 가 오랑캐를 소탕하겠다는 것이었다(『인조실록』 5년 10월 1일).

경과

진극일의 고변 이후 같은 날 원주목사홍보(洪靌)로부터도 이인거의 반란이 보고되었다. 조정은 보고를 지체하고 잠적한 감사최현을 교체하는 한편, 신경인(申景禋)을 도적 등을 체포하는 토포사(討捕使)로 삼아 포수 7백 명을 거느리고 양주(楊州)로 가게 하였으며, 삼남(三南) 지방의 군대들도 경계를 강화하도록 지시하여 반란의 확대를 예방하였다.

한편, 원주목사홍보는 10월 1일에 다시 반란을 진압하였다는 장계를 올렸다. 장계의 내용은 자신이 9월 30일에 횡성현감이탁남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즉시 횡성현으로 진군하여, 백여 명 남짓한 반란군을 제압하고 이인거와 두 아들, 반란군 24명 등을 사로잡았다는 것이었다(『인조실록』 5년 10월 1일). 이로써, 이인거의 반란은 허무하게 진압되었고 이인거를 비롯한 관련자들은 심문을 받은 뒤 사형에 처해지거나 유배되었다. 전 감사최현도 반란의 기미를 감지하지 못하고 일찍 보고하지 않은 죄로 투옥되었으나, 인조의 특명으로 석방되었다. 토벌에 공을 세운 홍보, 이탁남 등은 소무공신(昭武功臣)에 봉해졌다.

참고문헌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계승범, 「계해정변(인조반정)의 명분과 그 인식의 변화」, 『남명학연구』26, 남명학연구원, 2008.
  • 한명기, 『역사평설 병자호란』, 푸른역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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