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현(李英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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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07년(중종 2)∼1572년(선조 5) = 66세]. 조선 중기 중종(中宗)~선조(宣祖) 때의 문신.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과 예조 참판(參判) 등을 지냈다. 자는 희성(希聖)이다. 본관은 광주(廣州)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참판(參判)에 증직된 이람(李擥)이며, 어머니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목사(牧使)이승원(李承元)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통례(通禮)를 지낸 이극견(李克堅)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사간원(司諫院) 대사간(大司諫)을 지낸 이예손(李禮孫)이다. 고려 말의 명신(名臣) 이집(李集)의 5세손이기도 하다. 항상 춘추관의 사관(史官)을 겸임하여 『인종실록(仁宗實錄)』과 『명종실록(明宗實錄)』을 편찬하는 데에 편수관으로 참여하였다.

중종 시대 활동

1525년(중종 20년)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로 합격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19세였다. 그 뒤에 12년이 지나 31세가 되던 1537년(중종 32) 별시(別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다.[『방목(榜目)』] 1538년(중종 33) 탁영시(擢英試)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과거에 합격하고 처음에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에 보임되었다가, 뒤이어 홍문관(弘文館) 정자(正字)가 되었다. 1539년(중종 34) 성균관 박사(博士)을 거쳐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으로 전직되었다.(『중종실록』 34년 8월 2일) 1540년(중종 35) 사간원 정언(正言)이 되었다가, 홍문관 수찬(修撰)이 되었다. 또 이조 좌랑(佐郞)과 병조(兵曹) 좌랑을 역임하였고, 1542년(중종 37) 다시 사간원 정언(正言)이 되었다가 홍문관 부교리(副校理)가 되었다. 1543년(중종 38)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에 임명되었다가, 이듬해인 1544년(중종 39) 홍문관 교리(校理)가 되었다.[실록]

명종 시대 활동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났으나, 이영현은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다가, 홍문관 응교(應敎)가 되었다. 1546년(명종 1) 다시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다가, 1547년(명종 2) 사간원 사간(司諫)이 되었다. 1548년(명종 3) 사복시(司僕寺) 부정(副正)이 되었다가, 암행어사(暗行御史)로 황해도에 나가서 구황(救荒) 상황을 점검하였고, 또 암행어사로 전라도에 나가서 여러 고을의 민정(民情)을 염찰(廉察)하고 돌아온 후 임금에게 자세히 보고하였다.(『명종실록』 3년 3월 14일),(『명종실록』 3년 3월 30일) 1549년(명종 4) 다시 사간원 사간이 되었으며, 1550년(명종 5) 사헌부 집의(執義)가 되었다가 종부시(宗簿寺) 정(正)이 되었다.(『명종실록』 4년 3월 26일),(『명종실록』 5년 2월 13일),(『명종실록』 5년 3월 19일)

1553년(명종 8) 홍문관 전한(典翰)이 되었다가 1554년(명종 9) 홍문관 직제학(直提學)으로 승진하였으며, 임금의 특명(特命)으로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되어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다. 1557년(명종 12) 상호군(上護軍)이 되었다가, 이조 참의(參議)가 되었다. 그 뒤에 호조 참의와 병조 참의를 역임하였는데, 이조에 가장 많이 있었다. 1562년(명종 17) 청홍도관찰사(淸洪道觀察使 :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다가,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가 되었는데, 임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 개성의 백성들이 길에 나와 눈물을 흘리며 전송하였다. 그 뒤에 예조 참판(參判)과 형조 참판·공조 참판을 두루 역임하였다. 형조에 있을 때 죄수에 대한 판결(判決)을 명확하고 신실하게 처결하여, 실수한 바가 없었다.

1567년(명종 22) 중추부(中樞府) 첨지사(僉知事)로서 존시사(尊諡使)에 임명되어 명(明)나라에 가서 대행황제(代行皇帝 : 죽은 황제) 세종(世宗)가정제(嘉靖帝)의 존시(尊諡)를 올린 것을 축하하였다. 북경(北京)에서 사행의 소임이 끝나지 않았는데, 본국에서 명종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북경 회동관(會同館)의 옥하관(玉河館 : 조선 사신이 머물던 곳)에서 흰 소복(素服)으로 갈아입고 신하의 예절을 다하니, 회동관의 주객(主客) 청리사(淸吏司) 관리들이 조선 사신의 예절 바름에 감탄한 나머지 여러 가지 편의를 봐주었다.

1567년(선조 즉위년) 6월 명종이 돌아가고 선조가 즉위하였으나, 이영현은 거의 활동하지 않다가, 1570년(선조 3) 5월 구사맹(具思孟) 등과 함께 직첩(職牒)을 돌려받았다.(『선조실록』 3년 5월 13일) 이로써 미루어 보면, 그가 선조 초기에 무슨 잘못을 저질러서 관직을 파면당하였던 것이 분명하나, 기록이 없어서 알 수 없다. 1571년(선조4) 11월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고생하다가 1572년(선조 5) 10월 28일 오랜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66세였다.

성품과 일화

이영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성품이 자애롭고 행실이 간결하였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스스로 학업을 닦아 문단(文壇)에서 기예를 겨루면, 반드시 윗자리를 차지하였다. 나이 19세 때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31세 때에 대과(大科)에 급제하였는데, 그 경사스러운 날 연회할 때에 중종이 이영현을 태종(太宗)의 외손이라며 어주(御廚 : 궁궐 주방)에서 만든 진수성찬(珍羞盛饌)을 보내주니, 당시의 사람들이 영광스럽게 여겼다. 또 탁영시(擢英試)에 합격하자, 중종이 족친위(族親衛)에 명하여 앞에서 거리를 인도하여 유가(遊街)하도록 하고, 친왕자(親王子)와 여러 권귀(權貴)들로 하여금 돌아가며 잔치를 성대하게 열어서 그를 즐겁게 해주도록 하였다. 그가 경연(經筵)에서 임금 앞에서 강론할 때마다 풍부한 학식과 맑은 음성으로 시강(侍講)하여 중종의 칭찬을 받곤 하였다.

어머니가 살아 계실 적에는 녹봉을 모두 어머니에게 가져다 드리고 자기 마음대로 쓰지 않았다. 그가 두루 거친 높은 직책은 누구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 모두 자신의 힘으로 이루어낸 것이다. 소윤(少尹)윤원형(尹元衡)이 권력을 잡고 세도를 부릴 때 그의 뜻을 조금이라도 거스르면 가문이 곧바로 멸망하였지만, 이영현은 끝내 머리를 굽히지 않았다. 윤원형의 소윤 일파가 매우 노하기는 하였으나, 그에게 지적할 만한 하자(瑕疵)가 없었기 때문에 결국 그들의 보복을 면할 수 있었다.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이영현의 묘갈명(墓碣銘)을 보면, “을사사화가 일어났을 때 이영현이 홍문관 응교로 있었는데, 윤원형의 소윤 일파가 그에게 대간(臺諫)의 관직을 맡기려고 하였다. 응교이영현은 무고한 사람들이 줄줄이 죽은 것을 애통하게 여긴 나머지 병을 핑계대고 나아가지 않으니, 소윤 일파가 매우 노하여 그를 좌천시켜버렸다. 이때부터 9년 동안 한직(閒職)에서 머물렀다.”고 하였다. 또 “어머니 이씨(李氏) 부인이 돌아가자, 상여(喪輿)를 모시고 전라도 임피(臨陂)의 선영(先塋)으로 돌아가서 장사를 자냈다, 상복(喪服)을 벗은 뒤에도 여전히 묘소의 아래에 살면서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벼슬하라고 권유하면, 그는 눈물을 흘리며 대답하기를, ‘어찌 차마 어머니 묘소를 떠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실록을 보면, 이영현은 명종 초기에 오히려 화려한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쳤음을 확인할 수 있다. 김상헌(金尙憲)의 손자 김수항(金壽恒)이 절친한 친구 송시열에게 부탁하여 비문을 지었는데, 적어도 그 시기가 4세대 1백 2, 3십 년을 자났기 때문에 송시열이 잘못 기록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영현은 항상 서호(西湖)의 별장에서 노닐면서, 자연의 경관을 즐기며, 술잔을 들고 시를 읊조리며, 유연하게 속된 세상을 벗어날 생각을 하였다. 그가 일찍이 지은 시를 보면, 그의 생각을 대략 알 수 있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광주(廣州) 음촌(陰村)의 선영에 있는데, 5대조인 고려 말의 명신 이집의 묘소에서 1리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다. 이집의 외손인 송시열이 지은 묘갈명이 남아 있고, 심희수가 지은 행장(行狀)이 있다.

부인 평산 신씨(平山申氏)는 사직서(社稷署) 영(令)신원(申援)의 딸인데, 자녀는 1남 3녀를 낳았다. 외아들 이천경(李天慶)은 일찍 죽었고, 장녀는 현감(縣監)김대효(金大孝)에게, 차녀는 군수(郡守)남궁활(南宮活)에게, 3녀는 봉사(奉事)구사근(具思謹)에게 각각 시집갔다. 측실에서 1남 3녀를 낳았는데, 서자 이명백(李命百)은 진사(進士)이고, 서출 장녀는 판관(判官)김원복(金元福)에게 시집갔다. 맏딸과 맏사위 김대효가 자녀가 없어서 후사(後嗣)로 맞아들인 양아들이 바로 김상헌인데, 그 후손들이 조선 후기에 세도 정치를 행한 안동 김씨(安東金氏)이다.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명종실록(明宗實錄)』
  • 『선조실록(宣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송자대전(宋子大全)』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청음집(淸陰集)』
  • 『해동역사(海東繹史)』
  • 『숭덕재유고(崇德齋遺稿)』
  • 『인재집(忍齋集)』
  • 『미암집(眉巖集)』
  • 『소재집(穌齋集)』
  • 『임당유고(林塘遺稿)』
  • 『어우집(於于集)』
  • 『구암집(久庵集)』
  • 『광뢰집(廣瀨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