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향소(留鄕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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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초기 향리(鄕吏)를 규찰하고 향풍(鄕風)을 바로잡기 위하여 조직된 향촌 사회의 자치 기구.

개설

유향소(留鄕所)는 향사당(鄕射堂), 풍헌당(風憲堂), 향소(鄕所)로도 불렀으며, 경재소의 통솔을 받아 운영되었기 때문에 분경재소(分京在所)라고도 불렀다. 조선후기에는 향소, 향청(鄕廳)으로 더 많이 불렀는데, 이러한 명칭 변화는 조선전기에서 조선후기로 가면서 나타난 유향소의 성격 변화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유향소는 고려시대의 사심관제를 계승하여 고려말기~조선초기에 경재소와 함께 자율적으로 설치되었다. 고려시대의 재지(在地) 지배자였던 향리들이 고려말기에 군공(軍功) 등으로 첨설직(添設職), 검교직(檢校職), 동정직(同正職) 등을 받아 품관(品官)이 되자 그러한 품계를 받지 못한 향리들과 자신들을 구별하였다. 조선 개국 초 국가로부터 군인전(軍人田)을 지급받고 거경시위(居京侍衛)의 의무가 부과되기도 했으나 형식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대부분 자신들의 세거지(世居地)에 머물렀으며 토성품관(土姓品官), 재지품관(在地品官), 유향품관(留鄕品官) 등으로 불리면서 일련의 집단을 형성하고 있었다. 바로 이들이 그 지역 출신의 중앙 관인들과 유대를 갖고 자신들과 다른 향리들을 구별하기 위하여, 서울에 있는 경재소와 표리를 이루는 유향소를 지방에 설치하였다.

조직 및 담당 직무

유향소는 본래 경재소와 함께 향리의 규찰과 향풍의 교정에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중기에 이르기까지 향촌 사회의 자치 기구로 존속했으며 향촌 사회의 영향력 있는 지배층으로서 수령을 보좌하며 여러 가지 읍무(邑務)에도 간여하였다. 즉 초기의 유향소는 인재를 천거하고 변별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으며 호적·군적(軍籍)·국마(國馬)의 고실(故失)·포적(捕賊) 등 여러 가지 군무(軍務)에도 관여하면서 향권(鄕權)을 장악하였다.

1488년(성종 19)에 예조(禮曹)에서 각도(各道) 각관(各官)의 유향소를 복설하면서 유향소를 빙자하여 작폐하는 품관을 법으로 다스리기 위해 이전의 「유향소작폐금방절목(留鄕所作弊禁防節目)」을 증손(增損)한 「유향소복설마련절목(留鄕所復設磨鍊節目)」은 복설 유향소의 임원 차정과 규찰 내용을 규정하고 있다.

그 주요 내용은 첫째 유향소 품관은 부(府) 이상은 5명, 군(郡)은 4명, 현(縣)은 3명을 차정하는데 경재소가 택정하고, 둘째 유향소 설립의 본의가 악리를 규찰하여 향풍을 바로 잡는 것이므로 품관 등이 설립의 본의를 생각지 않고 권위를 가탁하여 작폐할 경우 수령 및 경재소가 철저히 이를 금지하고, 범죄자가 있을 경우 관찰사에 보고하여 과죄(科罪)하고 개차(改差)한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규찰 조목은 ① 수령을 조종하고 전권작폐(專權作弊)하는 자, ② 몰래 뇌물을 받고 차역(差役)을 불균(不均)하게 하는 자, ③ 수세(收稅)할 때 횡렴남용(橫斂濫用)하는 자, ④ 양민(良民)을 모점(冒占)하고 몰래 역사(役使)시키는 자, ⑤ 전장(田庄)을 광치(廣置)하고 백성을 시켜 경종(耕種)하는 자, ⑥ 거리를 횡행하며 백성을 침어(侵漁)하고 사(私)를 차리는 자, ⑦ 귀세(貴勢)에 추부(趨附)하여 본역(本役)을 피하려는 자, ⑧ 피역하여 도망한 자를 촌락에 숨기는 자, ⑨ 관위(官威)를 가탁(假托)하여 인민을 침어하는 자, ⑩ 양가녀(良家女) 및 관비(官婢)를 작첩(作妾)하는 자 등 10조목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를 고소하면 본관(本官)의 경재소가 사헌부에 고하여 조사·과죄하게 되는데, 도죄(徒罪)를 범한 자는 본도(本道)의 잔역리(殘驛吏)로 영속(永屬)하고 유죄(流罪)를 범한 자는 타도(他道)의 잔역리로 영속하며, 수령 중 알고도 조사하지 않는 자는 제서유위율(制書有違律)로 논한다고 되어 있다.

변천

유향소는 왕권의 대행자인 수령과 대립하여 중앙집권화에 점차 역행하는 경향을 띠게 되자 일시적으로 혁파되기도 하였다. 즉 1406년(태종 6) 6월 대사헌허응(許應)이 혁파를 건의하여 왕의 윤허를 받았다(『태종실록』 6년 6월 9일). 그러나 군현마다 강고하게 자리 잡은 유향품관 등의 저항으로 자치적인 기구였던 유향소가 전면적으로 혁파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415년(태종 15) 하륜(河崙)의 건의로 유향소를 대신하는 기구인 신명색(申明色)이 설치되기도 했으나(『태종실록』 15년 4월 19일), 1417년(태종 17) 11월에 곧바로 혁파되었다(『태종실록』 17년 11월 27일). 유향소 혁파에 관한 사실은 유향소의 복설을 논의하는 실록의 기사 속에서 찾을 수 있는데 1467년(세조 13)에 유향소가 혁파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그 이유로는 함경도 각관의 유향품관들이 이시애(李施愛)의 난에 가담하여 수령들을 마음대로 죽여서 혁파되었다는 설과, 세조 말년 충주민이 수령을 고소하려 하자 유향소에서 수령을 고소하는 것이 불가하다고 하면서 그 사람을 매우 침학한 사건이 세조에게까지 알려져 혁파되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1467년을 전후한 유향소의 혁파는 기본적으로 세조의 전제적인 중앙집권적 군현 지배 정책에 기인한 것으로 보이나, 당시에 혁파된 유향소는 「유향소작폐금방절목」을 증손하여 마련한 「유향소복설마련절목」을 기초로 1488년(성종 19)에 복설되었다.

「유향소복설마련절목」은 조선전기에 유향소가 복설되었다는 사실과 그 구체적인 운영 규정을 보여주는 자료로, 실록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으나 1924년에 간행된 『함흥신구향헌목(咸興新舊鄕憲目)』에는 실려 있다. 『함흥신구향헌목』에는 「유향소복설마련절목」이 1428년(세종 10)에 반포된 것으로 되어 있어 지금까지 그렇게 이해하여 왔으나, 이 절목에 나오는 동부승지 최응현(崔應賢)의 생몰 연대로 보아 당시 무신년은 1428년 무신년이 아니라 한 갑자 뒤인 1488년 무신년인 것이 확실해 보인다.

따라서 유향소가 복설된 시기는 1488년이며 유향소의 복설은 원래 사림파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러나 훈구 세력이 유향소를 장악하게 되자 사림파들은 사마소(司馬所)를 설치하여 유향소와 대립하기도 했으며 향약이나 사창(社倉)의 보급을 통하여 향촌 사회에 대한 지배권 확립도 기도하였다.

그러나 1603년(선조 36) 경재소가 혁파되면서 유향소는 권력의 원천을 상실하게 되었다. 즉 이 당시까지 유향소는 경재소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면서 수령을 견제할 수 있었지만, 경재소의 혁파로 수령이 좌수와 별감 등 향임을 임명하게 되면서 수령의 하부 기구로 전락하였다. 특히 1652년 「영장사목(營將事目)」의 반포를 계기로 향소, 즉 유향소가 군사 훈련에 나가는 군정(軍丁)을 통솔하는 의무를 가지게 되면서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면 영장의 곤장을 맞는 등 지위가 매우 격하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유향품관의 향권 참여는 재지사족(在地士族)들의 계층 분화를 초래하였다. 즉 제반 군무를 담당하여 향권을 장악하는 대신 수령의 보좌 기구로 전락하여 수령의 사역을 당하지 않으려는 사족은 향임 맡기를 기피하는 대신 향권을 탐내는 무리들은 즐겨 향임을 맡으려고 하였다. 이를 통해 17세기에 이르러 양반층의 계층 분화가 이루어지면서 사족이 향족(鄕族)과 유족(儒族)=사족으로 분화되었는데 이를 ‘유향분기(儒鄕分岐)’라고 하였다.

또한 18세기 이후에는 좌수나 별감 등 향임을 맡는 향족층과 향교(鄕校)의 교임(校任)이나 서원(書院)의 원임(院任)을 맡는 유족층의 분화 현상도 일어났다. 한편 서얼이나 신흥 부민 등 신향(新鄕)들이 구향(舊鄕)에 대하여 향권에 도전하면서 빚어진 분쟁도 유향분기라고 하였다. 유향분기 이후 유향소는 향리를 규찰하고 향풍을 바로잡는 기능은 약화되고, 주로 수령의 사역을 당하는 향리와 같은 지위로 전락하였다. 따라서 유향소의 명칭도 주로 ‘향소’나 ‘향청’으로 불리게 되었다.

좌수, 별감 등과 같은 향임은 경재소가 존속되고 있을 때에는 경재소에서 선임했으며 따라서 경재소-유향소가 하나의 체제를 이루어 수령을 견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1603년 경재소가 혁파된 이후에는 재지사족들의 모임인 향회에서 추천권을 가지는 지역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수령이 좌수, 별감 등 향소를 임명하는 방식을 취하여 향소가 수령의 보좌 기구로 전락하게 되었다. 다만 경상도 안동처럼 사족 세력이 강한 지역에서는 임기를 마친 전임 좌수가 후임을 택정하기도 하는 등 조선 전기 유향소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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