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단삼(禮單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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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일 간에 이뤄진 공무역에서 조선 측이 일본에 수출한 인삼.

개설

서양의 근대의학이 뿌리를 내리기 전에는 조선과 중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조선인삼이 중요한 한약재로 엄청난 수요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조선과 일본 사이의 무역을 독점하고 있던 대마도는 여러 통로를 통해서 우수한 조선인삼을 조달하여 일본 상류층에 비싼 값에 팔아넘겼는데, 그 과정에서 대마도는 막대한 이윤을 챙겼다.

예단삼이란 조선의 대일 공무역에서 일본에 지급하던 인삼으로, 조선 조정이 일본 측 사신의 왕래에 맞추어 지급하던 인삼을 말한다. 조선후기를 통하여 일본 측 사신의 왕래는 크게 정기 사절로 1609년에 조일 간에 체결된 기유약조(己酉約條)로 파견이 허용된 연례송사(年例送使)가 있으며, 부정기 사절로는 특별한 임무가 있을 때 수시로 파견되었던 차왜(差倭)가 있다.

연원 및 변천

예단삼이라는 용어는 본래 조선의 관청에서 사용하던 관용어(官用語)였다고 한다. 이것이 후대에 민간과 일본의 인삼 거래자들 사이에서도 통용된 것이라고 한다. 한편, 조선후기 대일관계에서 예단삼이란 용어가 어떤 과정을 거쳐 정착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자세한 기록은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예단(禮單)이란 예물단자(禮物單子)의 준말이며, 여기에 인삼의 줄임말인 삼(蔘)을 붙여 예단삼이라고 한 것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예물로 보내는 물목 가운데 들어 있는 인삼, 즉 예물로 보내는 인삼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예단삼이라는 용어는 조선과 일본 사이의 사신왕래와 함께 등장했다고 볼 수 있다.

『만기요람(萬機要覽)』에 따르면 조선이 일본의 대마에서 건너온 연례송사와 각종 차왜에게 지급하는 예단을 단삼(單蔘)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이 특별히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할 때 가지고 간 인삼은 신삼(信蔘)이라고 하여 단삼과 구별하여 썼다.

『만기요람』 「채용편」 차왜예단조(差倭禮單條)와 단삼조(單蔘條)에 따르면 연례송사에게 지급된 예단삼은 세견 제1선에 4근 10냥, 이정암선(以酊庵船) 2근, 특송선(特送船) 13근 12냥, 만송원선(萬松院船) 3근 10냥, 부특송선(副特送船) 6근 16냥으로 총 30근 14냥으로 되어 있다. 차왜의 왕래는 부정기적이면서 매우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는데, 그때마다 조정은 예단삼을 지급했다. 연례송사는 연 1회로 횟수가 고정되어 있어 예단삼의 반출 내역을 파악할 수 있지만, 차왜는 기본적으로 횟수의 제한이 없었기 때문에 예단삼의 지급량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조달 방법

조선 정부가 예단삼을 조달하는 방법으로는 세 가지가 있었다. 첫째, 사무역(私貿易)을 통해서 거래되던 인삼에 10%의 세금을 부과하여 그 세수입(稅收入)으로 공무역에서 지급할 예단삼을 충당하는 방식이다. 즉 세삼(稅蔘)으로 예단삼을 지급하였던 것이다. 둘째, 공인(貢人)에게 공가(工價)를 지급하여 조달하도록 하는 방법이 있었다. 셋째, 인삼 대금을 강계부(江界府)에 직접 하달하여 강계부로 하여금 예단삼을 조달하도록 하는 방법 등이다(『영조실록』 29년 3월 19일) (『정조실록』 3년 8월 24일).

그러나 사무역의 쇠퇴와 인삼에 대한 초과수요에 따른 인삼의 수급불균형은 조정과 인삼의 직접 생산자인 농민에게 경제적 부담을 가중시켰다. 결국 조선 측에서는 갈수록 품질이 떨어지는 인삼으로 지급하게 되었고, 일본 측에서는 이것을 구실로 예단삼의 수령을 거부하여 미수(未收)가 누적되면서 양국 간에 심한 마찰을 빚기도 하였다. 18세기 초반 덕천길종(德川吉宗) 정권의 주도로 일본의 인삼 국산화 정책이 추진되어 인삼무역은 정체되지 않을 수 없었다.

참고문헌

  • 『만기요람(萬機要覽)』
  • 정성일, 『朝鮮後期 對日貿易』, 신서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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