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녕전(永寧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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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역대 왕과 왕비 중 종묘 정전에 남지 못한 신위(神位)를 봉안한 사당.

개설

조선시대의 국가 오례 중 길례(吉禮)에 속하며, 대사(大祀)·중사(中祀)·소사(小祀)로 구분되는 조선시대 국가 제사 체계 중 등급이 가장 높은 대사에 해당하였다. 영녕전은 처음에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직계 4대조인 목조(穆祖)·익조(翼祖)·도조(度祖)·환조(桓祖)를 봉안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그러다가 나중에 불천지주(不遷之主)가 되지 못하여 종묘 정전에 계속 남지 못하는 왕들이 영녕전의 좌우 협실(夾室)에 봉안되었다. 불천지주란 후대의 왕과 신하들이 제사 지내는 대(代)의 수가 다 되는 친진(親盡)에 이른 왕의 공덕(功德)을 평가한 뒤 공덕이 높아 영원히 옮기지 않기로 결정한 신주를 말한다.

협실은 ‘익실(翼室)’이라고도 하는데 종묘 정전과 영녕전 정전에 날개 모양으로 붙어 있는 건물이다. 세종대에 영녕전의 건립을 처음 논의할 때에는 좌우 협실을 각 1칸씩 만들기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1474년(성종 5)에 편찬된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例)』 영녕전에는 좌우 협실이 각 2칸으로 그려져 있다. 따라서 세종대 논의 이후 실제 영녕전을 건립하는 과정에서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이를 보여주는 문헌 자료는 현재 남아 있지 않다. 또, 조선전기에는 영녕전의 협실이 의물(儀物)을 보관해 두는 곳이라는 기록도 있으나 그 구체적인 용도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16세기 연산군대 이후에는 협실도 신주를 봉안하는 신실(神室)로 사용되었다.

변천 및 현황

영녕전은 1421년(세종 3) 10월에 완공되었고, 정전 4칸과 좌우 협실 각 2칸으로 된 구조였다. 당시 상왕(上王)이었던 태종이 종묘 정전의 서쪽에 별도의 사당을 짓도록 하고, ‘영녕전’이라 이름지었다. ‘영녕(永寧)’은 조종과 자손이 함께 편안하다는 뜻이다. 처음에 태조의 직계 4대조를 봉안하기 위해 건립되어 정전이 4칸이었다. 그 때문에 정전의 4칸은 이후에도 건물의 구조면에서 변함이 없었다.

그 뒤 세월이 흐르면서 후손들 입장에서 친진에 이른 왕의 공덕을 평가하면서 공덕이 부족하다고 판단한 왕들이 종묘 정전에 남지 못하고 영녕전의 좌우 협실에 옮겨 봉안되었다. 이러한 왕이 점차 증가하면서 불가피하게 좌우 협실을 증축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종묘 정전보다 긴 날개를 갖게 되었다.

영녕전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당시에 종묘와 함께 모두 소실되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도 종묘와 함께 곧바로 중건(重建)하지 못했는데, 이는 전쟁에 따른 물자의 궁핍으로 무리한 건축 사업을 벌일 수 없어서였다. 영녕전의 중건은 종묘와 함께 선조 말년에 시작되어 광해군이 즉위하던 1608년(광해군 즉위)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영녕전은 임진왜란으로 불탄 뒤 중건하면서 정전은 예전 그대로 4칸으로 중건하였지만 좌우 협실은 각 3칸으로 중건하였다. 이후 현종대에 좌우 협실을 1칸 더 증수하여 정전 4칸, 좌우 협실 각 4칸이 되었다. 다시 헌종대에 좌우 협실 각 2칸을 더 증축해 현재 남아 있는 것처럼 정전 4칸에 좌우 협실 각 6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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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태

정전 정면 4칸, 좌·우 협실 각 정면 6칸, 동·서 월랑 각 정면 5칸 측면 1칸으로 되어 있다. 영녕전의 동월랑 뒤에 제기고(祭器庫)가 있다.

동문(東門) 옆에 전사청(典祀廳)이 있어야 하는데 현재는 건물은 없고 주춧돌만 남아 있다. 대한제국 시기에 편찬된 『대한예전(大韓禮典)』에는 전사청이 그려져 있다. 1946년 9월 26일 이후 편찬된 『종묘수복청일기(宗廟守僕廳日記)』를 보면, 해방 전후 폭격으로 사라졌을 수도 있고, 혹은 6·25 전쟁으로 소실되었을 가능성도 있는데 그간의 사정을 분명하게 기록한 문헌이 발견되지 않아 없어진 연유를 현재로서 알기가 어렵다.

관련사건 및 일화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일본군은 빠르게 북상했고, 선조는 피란길에 올랐으며, 이윽고 한양은 일본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이때 종묘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한다.

상이 서쪽으로 파천하면서 사관(祠官)으로 하여금 종묘와 사직의 신주와 위판을 받들고 먼저 떠나도록 하였다. 5월에 적이 경성을 함락했을 때에는 궁궐이 모두 불타서 왜(倭)의 대장 다이라노 히데이에[平秀家]가 무리를 이끌고 종묘로 들어가 거처하였다. 그런데 밤마다 신병(神兵)이 나타나 공격하는 바람에 적들은 번번이 놀라 칼로 서로 치고 죽이는 통에 죽는 자가 많았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곳은 조선의 종묘로서 신령이 있는 곳이다.’고 하자, 다이라노 히데이에가 두려워하여 마침내 종묘를 태워버리고 남방(南坊)으로 옮겨 거처하였다. 남방은 바로 남별궁(南別宮: 지금의 서울 중구 소공동 조선 호텔 자리에 두었던 별궁)이다(『선조수정실록』 25년 5월 1일).

참고문헌

  • 『종묘의궤(宗廟儀軌)』
  • 강문식·이현진, 『종묘와 사직』, 책과함께, 2011.
  • 김문식·한형주·이현진·심재우·이민주, 『조선의 국가 제사』, 한국학중앙연구원, 2009.
  • 윤방언, 『조선왕조 종묘와 제례』, 문화재청,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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