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광사(新光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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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 국가에서 공인한 36사(寺) 가운데 하나로, 황해도 해주북숭산에 있던 절.

개설

황해도 해주북숭산(北嵩山)에 있던 사찰로 고려시대에는 나한상과 나한재로 유명했다. 원 황제의 원찰로 지정되어 대규모 중창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조선 세종대에는 선·교 양종의 교종 18사에 포함되었고 조선후기에도 사격이 유지되었다.

연원

신라시대에 창건되었다고 하며 기록에 나오는 것은 923년(고려 태조 6) 중국에 사신으로 갔던 윤질(尹質)이 500 나한상을 가져오자 태조가 이 절에 봉안하게 한 것이 최초이다. 1026년(고려 현종 17)에는 현종이 직접 행차하였고 1053년(고려 문종 7)에는 문종이, 1102년(고려 숙종 7)에는 숙종이 나한재를 개설하였다. 1342년(고려 충혜왕 복위 3) 원의 마지막 황제인 순제(順帝)가 개인적 인연이 있었던 이 절을 원찰로 지정하여 대규모로 중창하였다.

변천

조선 태종대에 불교 종파가 11개에서 7개로 축소되었고 세종대에는 다시 선·교 양종으로 통합이 이루어졌다. 1424년(세종 6) 세종은 기존의 7개 종단을 선·교 양종으로 나누고 각각 18개씩 36개 사찰만 공인하였는데, 이때 신광사는 교종 18사 중 하나로 지정되었다. 신광사는 원래 보유한 전지 200결에 50결이 추가로 지급되어 250결을 가지게 되었고 거주하는 승려는 120명으로 정해졌다. 이는 교종도회소인 흥덕사와 양주장의사(藏義寺)와 같은 수준이었고, 교종 18개 사찰 가운데는 왕실의 주요 능침사 및 원당이었던 연경사(衍慶寺)표훈사(表訓寺)만 전지와 승려의 규모가 이들보다 컸다. 『세종실록』「지리지」의 해주 조목에는 신광사가 해주의 북쪽에 있으며 교종 소속으로 전지 250결이 주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후 명종대에는 신광사 주지 도정(道正)이 방장(方丈)실에 들어와 있던 유생 2명을 구타하고 달아매었다가 풀어준 일이 발생하여 문제가 되었다. 이에 대해 사관(史官)은 양종을 다시 세우고 승려를 선발하는 시험인 승과(僧科)를 재개하자 왕실에서 서민까지 불교에 귀의해 복을 빌었고 승려들이 왕의 비호를 믿고 방자해져서 조정 신료를 업신여기고 유생을 결박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격렬히 비판하였다(『명종실록』 19년 9월 10일). 1677년(숙종 3)에는 큰 화재가 일어나 다음 해에 중건하였고 1705년에는 나한전이 건립되는 등 조선후기에도 존속하였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 권상로, 『한국사찰전서』, 동국대학교출판부, 1979.
  • 사찰문화연구원, 『북한사찰연구』, 한국불교종단협의회, 1993.
  • 이능화, 『조선불교통사』, 신문관, 1918.
  • 탁효정, 「조선시대 왕실원당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2.
  • 高橋亨, 『李朝佛敎』, 寶文館, 1929.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