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하지맹(城下之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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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병자호란 때 인조가 삼전도에 나아가 청나라 태종에게 굴욕적으로 항복하고 맹약(盟約)을 체결한 일.

개설

성하지맹은 병자호란 때 인조가 청나라 태종 앞에 나아가 항복하고 12개 조항의 맹약을 체결한 일을 말한다. 이 맹약으로 조선과 청나라는 신하와 임금의 관계로 전환되었다. 성하지맹은 당시 조선 지식인들에게 반청의식을 불러왔으며 이는 북벌론(北伐論)과 존주론(尊周論)으로 이어졌다.

내용 및 특징

성하지맹이란 『춘추좌씨전』 환공(桓公) 12년조에서 유래한 말로, 초(楚)나라가 교(絞)로 쳐들어갔을 때, 초나라의 굴하(屈瑕)가 땔나무를 하는 인부를 호위병을 붙여 내보내서 유인하는 계책을 내었는데, 그 계책이 적중하여 교의 군대가 앞을 다투어 초나라 인부들을 쫓아 산속으로 달려가서 결국 잠복해 있던 초나라 군사들에게 섬멸되고 성 아래에서 맹세하고 돌아갔다는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대단히 굴욕적인 항복을 의미하였다.

조선의 경우 병자호란 때 전세가 어렵게 되자 결국 인조가 삼전도에 나아가 청나라 황제 앞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인조는 남염의(藍染衣) 차림으로 백마를 타고 의장(儀仗)을 모두 제거한 채 시종 50여 명을 거느리고 청나라 진영으로 갔으며, 청나라 태종은 황옥(黃屋)을 펼치고 앉아 있고 갑옷과 투구 차림에 활과 칼을 휴대한 자가 방진(方陣)을 치고 좌우에 둘러섰으며, 악기를 진열하여 연주하는 모습이었다. 인조는 청나라 태종 앞에 나아가 3번 절하고 9번 머리를 조아리는 항복 의식을 거행하였다(『인조실록』15년 1월 30일). 이때 인조와 청나라 태종 사이에 체결된 맹약의 내용은 청국과 조선이 군신(君臣)의 의리를 맺으며, 명나라와는 우호 관계를 끊고, 조선 왕의 장자와 차자, 대신의 아들을 인질로 보낼 것, 청국이 명나라를 공격할 때 기일을 어기지 않고 군병을 보낼 것 등 모두 12개 조항이었다.

변천

인조와 청나라 황제 사이에서 이루어진 맹약은 당시 조선 사회에서 치욕적인 것이었다. 왕이 몸소 청나라의 진영에 나아간 것이라든지, 대군과 빈궁이 포로가 되고 세자가 인질이 된 것 등은 소중화라고 자부하던 조선의 사림들이 오랑캐라고 여기던 청나라에 항복한 것이었으므로 대단히 수치스러운 것이었다(『인조실록』18년 5월 9일). 조선 사림들의 수치심은 전란 후 반청의식의 고조로 이어지면서 그것이 결국 북벌론과 존주론으로 나타났다. 북벌론은 청나라를 공격하여 멸망시킴으로써 상처받은 국민의 자존심을 회복하자는 논리였고, 존주론은 공자(孔子)가 주장한 『춘추』의 대의, 즉 주(周) 왕실을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이념에서 나온 것으로 여기서 주 왕실은 중화의 문물을 가진 문화국가를 의미하였다.

이후 명나라가 완전히 멸망하고 청나라가 중국을 완전히 장악한 뒤에 북벌론과 존주론은 조선중화주의로 이어졌다. 이것은 중화 문물의 계승자를 조선으로 설정함으로써 조선을 동아시아 문화의 중심국으로 회복하자는 자부심의 산물이었다. 조선중화주의에 입각해서 숙종대에 창덕궁 후원에 명나라 의종을 제사 지내는 대보단(大報壇)이 건설되었고, 영조대에는 대보단에 의종과 함께 명나라 태조와 신종을 배향하고 제사지냈다.

참고문헌

  • 김문식, 『조선후기 지식인의 대외인식』, 새문사, 2009.
  • 정옥자, 『조선후기 조선중화사상 연구』, 일지사, 1998.
  • 이장희, 「병자호란」, 『한국사 29-조선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국사편찬위원회, 1995.
  • 허태구, 「병자호란의 정치·군사사적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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