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시(成均館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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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 유생들을 대상으로 시행하는 식년시나 증광시의 문과초시 중 하나.

개설

식년시나 증광시의 문과초시의 경우 각 지역별 시험 이외에 성균관 유생만을 대상으로 하는 초시를 성균관시라고 하였으며 약칭하여 관시(館試)라고 하였다. 식년시의 경우 성균관에서 기숙하며 수학하였다는 증빙이 되는 원점(圓點)을 300점 이상 채운 유생에 한해서 관시에 응시할 수 있었다. 원점은 수업 출결 점수였다.

내용 및 특징

성균관시라고 하면 성균관에서 시행된 모든 시험을 일컫는 것으로 오해하기 쉬우나, 식년시나 증광시의 초시인 관시 이외에 정규 과거가 아닌 3월 3일, 9월 9일 등의 절일에 치러지는 절일제(節日製)나 왕 앞에서 경전을 강(講)하게 하는 전강(殿講) 또는 성균관 유생들의 정기 시험인 통독(通讀) 등의 과시(課試)는 성균관시라 하지 않고 반제(泮製)나 반시(泮試)라고 하였다.

관시에 배정된 초시 입격 인원은 50명으로서 지역에 할당된 최대의 초시 입격 인원인 한성시(漢城試) 40명보다 10명이 더 많았다.

조선 최고의 교육기관이었지만 성균관이라는 단일 교육기관에 초시 입격 인원을 50명 배정하였다는 것은 그만큼 성균관을 거쳐 문과에 급제하도록 하는 게 국가를 경영할 인재를 선발하는 데에 효과적일 것이라고 기대하였음을 말해준다.

관시에 50명의 정원을 배정한 것은 성균관 유생에 대한 일종의 특혜라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성균관에서 수학할 수 있는 생원·진사라고 해서 무조건 관시에 응시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원점 300점을 채워야 관시에 나아갈 수 있었다.

변천

식년시뿐만 아니라 증광시에서도 관시가 시행되었는데, 1662년 증광문과의 관시는 폐지되고 해당 입격 인원은 한성시 두 시험장에 분속시켰다(『현종실록』 2년 8월 20일). 이후 관시는 식년문과의 초시로서만 시행되었으며, 이런 조치는 『속대전』에 반영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이상무, 「인조-숙종대의 별시 운영과 성균관 교육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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