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예부(盛京禮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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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청의 성경에 설치되어 각종 제사·조회·연향의 업무를 관장하였던 예부.

개설

청의 배도(陪都)였던 성경에 설치된 성경예부는 조·청 관계에서 북경의 예부와 유사하게 각종 외교문서 및 의식물품에 밀접한 관련이 있던 관청이다. 강희·옹정·건륭제의 성경행차가 빈번하자 행재소의 예부로서 역할을 수행하여 북경 예부의 기능을 대행하였다. 봉금 정책이 시행되면서 성경에 소재한 각종 능원 행사 및 청의 대조선 관계 통로로 성경이 강조되어, 성경예부는 대조선 외교 관청으로 중시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643년(숭정 16)에 만주족 근거지에 대한 보존의식과 중원에 대한 배후 중심지 조성 목적에서 심양이 성경(盛京)으로 개칭되고, 다음 해에 정식으로 배도가 되었다. 성경의 모든 관원의 전선(銓選)을 북경의 이부에서 주관하였기 때문에 성경에는 이부를 제외하고 호부·예부·병부·형부·공부의 5부가 설치되었다. 1658년(순치 15)에 성경에 예부가 처음 설치된 이후 다음 해에 호부·공부가 설치되었다. 1662년(강희 원년)에 형부가 설치되고, 1691년(강희 30)에 병부가 설치되었다. 성경예부는 중앙의 예부와 동일하게 성경에서 진행되는 제사·조회·연향의 의식 및 사용물품을 담당하였다.

조직 및 직무

성경예부는 시랑 1명, 좌사(左司) 낭중(郞中) 1명, 원외랑 2명, 우사(右司) 낭중 1명, 원외랑 2명, 장주사(掌主事) 1명, 독축관(讀祝官) 8명, 찬예랑(贊禮郎) 16명, 필첩식(筆帖式) 10명, 관우정육품관(管于丁六品官) 1명, 봉황성영송조선관(鳳凰城迎送朝鮮官) 3명, 조교(助敎) 4명이 조의(朝儀)·사전(祀典)·직공(職貢)·교습(教習)의 일을 관장하였다. 이외에 목무총관(牧務總管) 1명이 목장관련 업무를 관장하였는데, 6품의 익령(翼領) 1명, 7품의 목장(牧長) 17명, 8품의 부목장(副牧長) 17명, 목부(牧副) 34명 등이 있어 예부의 지휘를 받았다.

청의 입관 이후 북경으로 천도하면서 심양은 일시적으로 외교적 기능이 축소되었지만, 성경으로 지정되면서 조선사행의 경로는 성경을 경유하여 입경하도록 결정되었다. 대청 관계의 중간 경유지로서 역할이 있어 청에 전달하는 외교문서는 성경에서 부본을 일차적으로 전달하면 성경예부에서 이를 조선사행과 별도로 먼저 북경의 예부로 전달하였다. 조선의 입장에서 북경예부에 제출하기 전에 외교문서를 점검할 기회를 가지는 의미도 있었다.

행재예부로서의 역할도 있어 황제가 성경에 행차한 경우에 성경예부에 외교문서를 전달하기도 하였다(『정조실록』 7년 8월 23일). 원래 조선과 성경은 외교문서의 왕래가 없었지만, 1727년(영조 3) 호가패(胡嘉珮) 사건으로 성경에 처음 외교문서를 왕래한 이후 조선에 근접한 관계로 조청 관계에서 발생하는 각종 외교사안, 중강개시 등 교역사안, 월경인의 처리에 관련한 외교사안과 관련하여 성경예부와 외교문서를 왕래하였다.

청의 봉금 정책 이후 성경은 자체적인 이익 관계에 의하여 중앙정부 차원의 입장과 달리 조선과의 교역·범월·강역 등 문제를 처리하였다. 이는 조선의 대청 관계에 복잡한 양상을 초래하여 성경예부에 대한 외교 정책을 정립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의의

조선후기 조·청 관계에서 성경예부는 청의 대조선 외교관청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성경으로 지정된 이후 예부가 가장 먼저 설치된 점은 성경의 국가적 기능이 예부소관 업무가 중심이었음을 보여 주는 것으로 조공 체제에서 외교 업무를 예부에서 전담하였던 점을 감안하면 성경예부는 조선후기 발생하는 각종 범월·교역·범금 등 외교사안에 실질적인 주 담당관청이었다.

참고문헌

  • 『동문휘고(同文彙考)』
  • 『대청회전(大淸會典)』
  • 李雲泉, 『朝貢制度史論』, 新華出版社, 2004.
  • 김경록, 「조선후기 사대문서의 종류와 성격」, 『한국문화』 35, 2005.
  • 김경록, 「조선시대 대중국 외교문서의 접수·보존체계」, 『한국사연구』 136,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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