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청(三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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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대에 설치한 단송도감의 송사 처리 과정에 이용된 3단계의 판결처 이름.

개설

1481년(성종 12)에 성종은 송사(訟事)의 판결을 원활히 하기 위해 단송도감(斷訟都監)을 설치하였다. 단송도감이라는 이름은 성종이 직접 정한 것이다. 성종은 송사를 심리(審理)하는 관원들이 여러 날 지체시키면서 결단하지 못하는 것은 의심하는 마음을 너무 많이 가졌거나 사가(私家)의 청탁을 들어주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당시 장례원(掌隷院)의 소송 서류가 900여 통이나 될 정도로 많았으므로 성종의 지적은 적절한 것이었다.

내용 및 특징

관리들은 성종이 단송도감을 설치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찬성하지 않았으며, 단송도감의 관리가 되는 것을 거절할 정도였다(『성종실록』 12년 1월 4일). 그러나 성종은 장례원에 400여 명이 소송을 하고 있다면서 이들을 귀농시켜 원통함을 풀어주는 것이 국가의 도리라고 하였다. 이때 성종은 소송 서류를 본도에 세 번 이첩(移牒)하여 첩지(牒紙)가 되돌아오면 세 번 단송도감에 회부하도록 명하였다(『성종실록』 12년 1월 12일). 단송도감에서는 일청(一廳), 이청(二廳), 삼청(三廳)의 소송 판결 절차를 만들어 처리하였다.

단송도감의 판결은 일청에서 잘못하면, 이청에서 다시 판결하고, 이청에서 잘못하면 삼청에서 다시 판결하는 소송 체제였다(『성종실록』 12년 2월 2일). 단송도감에서 판결하는 것은 한 번으로써 변경할 수 없게 하였는데, 삼청의 오결(誤決)을 방지하기 위한 방도였다. 그런데 삼청을 거치는 송사는 많은 시간을 소요할 염려가 있었다(『성종실록』 12년 2월 6일).

삼청은 평소에는 설치되지 않고, 송사가 벌어지거나 사건이 발생하였을 때 그 해결을 위한 과정에서 임시로 관사를 마련하여 진행하였다. 예컨대 1488년(성종 19) 5월에 왕심리(往心里) 인근에서 여자 변사체가 발견되자 태평관(太平館)에 삼청을 나누어 추문하였다(『성종실록』 19년 5월 20일). 삼청에서는 송사 해결을 위해 노비의 증언을 받기는 해야 하나 주인을 고발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처결을 내렸다(『성종실록』 19년 6월 12일). 이처럼 신분제를 벗어난 송사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변천

삼청의 기능은 성종대에만 보인다. 성종 이후 연산군대와 중종대에도 다시 설치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