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사(三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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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조정 내 언론을 담당하였던 사간원·사헌부·홍문관의 합칭.

개설

삼사는 조선시대 언론 활동을 담당한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을 합해서 부르는 명칭이다. 성종대 홍문관 설치를 계기로 삼사의 언론 활동이 활발해졌으며, 동시에 16세기에는 언론의 논의 구조가 정착되기 시작하였다. 삼사는 자신의 의견 관철을 위해 의견을 합계(合啓)의 형식으로 제출하였는데, 자신들의 의견이 공론이며 언관의 전체 의견이라고 하여 왕과 고위 관원들의 견제를 막았다. 삼사 관원들은 논의의 공정성을 담보하기 위해 피혐(避嫌)과 처치(處置) 등의 관행을 활용하기도 하였다.

17세기 삼사의 언론 활동은 대신과 재상들의 권력을 견제하며 공론 정치를 활성화시켰다. 그러나 17세기 후반 이후 탕평책이 실시되면서 견제를 받았으며, 그 위상 또한 상당히 위축되었다.

한편 법을 집행하는 의금부(義禁府)·형조(刑曹)·한성부(漢城府)를 삼사로 지칭하기도 하였고(『성종실록』 9년 1월 13일), 사역원(司譯院)·관상감(觀象監)·전의감(典醫監)을 삼사로 지칭하기도 하였다(『성종실록』 13년 3월 11일). 또한 호조(戶曹)의 속사(屬司)인 판적사(版籍司)·회계사(會計司)·경비사(經費司)를 삼사로 표현하듯이 육조(六曹)의 속사도 역시 삼사로 표현하였다(『연산군일기』 2년 7월 18일).

설립 경위 및 목적

조선시대 삼사는 사간원·사헌부·홍문관을 지칭한다. 이 중 사헌부는 1392년(태조 1)에 설치되었으며, 사간원은 1392년에 문하부(門下府)의 낭사(郎舍)로 설치되었다가 1401년(태종 1) 문하부가 혁파되면서 독립 관서로 설치되었다(『태종실록』 1년 7월 13일). 이들은 대간(臺諫) 또는 대각(臺閣) 등으로 불리며, 조정 내에서 언론 활동을 담당하였다.

1478년(성종 9) 홍문관(弘文館)이 설치되고 언론기관으로 변질되자 사간원·사헌부에 홍문관을 합하여 삼사라고 불렀다. 홍문관은 세종 때 있었던 집현전(集賢殿)을 계승한 것으로, 장서(藏書) 기능과 함께 왕에 대한 자문 역할을 위해 설치되었다. 성종은 홍문관을 설치한 이후 새롭게 정치에 진출한 사림계 인물들을 홍문관에 배치하였는데, 이는 홍문관을 통해 훈구 세력을 견제하려는 이유에서였다. 성종 초기 사림계 인물들이 사헌부나 사간원에 진출하였으나 그들의 정치적 역할에는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홍문관을 설치하고 이를 언관화(言官化)함으로써 양자를 보완하였던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몇 가지 주목되는 변화가 나타났다. 대간의 탄핵 활동에 제한이 되었던, 발언의 출처에 대해 문제를 삼지 않도록 하는 관행이 성립하였다. 이른바 풍문탄핵법(風聞彈劾法)이 확대된 것으로, 이로써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서도 대간은 사림의 풍문만으로도 언제든지 조정의 관원들을 탄핵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밖에도 대간의 의사 결정 장치로 만장일치제인 원의(圓議)에 대한 보장이 이루어졌고, 고위 관원들에게 간섭을 덜 받으면서 원의의 결과임을 드러낼 수 있는 새로운 형식인 차자(箚子)가 도입되었다. 또한 홍문관원의 후보자 명단인 홍문록(弘文錄)의 선발 과정을 통해서 왕이나 대신 혹은 고위 관료들의 자의적인 인사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가 마련되었다.

이렇게 조정 내 언론 활동에 대한 여러 가지 제도적인 장치들이 강구되면서 대간과 홍문관은 상보(相補)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 15세기 말경에 이르면 이들 기관을 합쳐서 삼사로 인식하는 기록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삼사는 공론(公論)의 소재이고 이들의 언론은 공적인 것으로 인식되었다[『연산군일기』 1년 2년 2월 6번째기사].

한편 이 시기 삼사 중심의 언관권 형성은 낭관권(郎官權)의 형성과 밀접한 관련을 가졌다. 낭관은 통청권(通淸權)을 통해 삼사 관원의 인사를 장악하여 이들을 보호하였고, 언관은 낭관이 각 부서에서 당상관과 의견을 달리할 때 낭관의 입장에서 언론을 행하여 낭관을 지원해 주었다.

조직 및 역할

삼사를 구성하는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관원 구성은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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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사의 주된 임무는 정책이나 인사에 대한 비판 또는 탄핵 활동, 왕에 대한 간쟁(諫諍) 등이었다. 그리고 그 대상은 왕을 비롯한 모든 관료였다. 삼사는 자신의 이런 활동을 위해 일정한 논의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어떤 사안에 대한 논의의 시작은 대개 대간에서부터 출발하며, 대간의 경우 어느 누구라도 먼저 논의를 발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간 개인의 독계(獨啓)보다는 관서 단위로 혹은 사헌부와 사간원이 합동으로 올리는 양사합계(兩司合啓)나 삼사가 함께하는 삼사합계(三司合啓)의 형태로 왕에게 보고되었다. 대간이 합계하면 홍문관에서도 이에 동조해야 했으며 만약 소극적으로 나올 경우 ‘서로 규찰하는 도리[相規之道]’에 어긋난 것으로 인식하였다(『인조실록』 13년 1월 11일). 이는 왕이나 대신 혹은 재상들의 견제 속에서 삼사의 발언에 힘을 얻기 위한 것으로 공론의 표방과 전체 구성원들의 의견 통일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대간들이 아직 상회례(相會禮)를 행하지 않았거나 피혐(避嫌) 등으로 동료 관원이 한 명도 없는 경우에는 독계가 인정되었다. 그리하여 독계를 한 이후에는 역시 피혐계를 왕에게 올렸다(『효종실록』 3년 9월 17일).

삼사의 논의는 몇 단계를 거쳐 왕에게 보고되었다. 먼저 대간 중 누군가가 논의를 제기하는 발론(發論)할 일이 있으면, 동료들에게 통보하는 간통(簡通)을 거친다. 동료들에게 간통을 한 뒤에 대간들이 모두 모여 논의를 하는데, 이때 반드시 만장일치를 추구하였다. 이를 원의(圓議) 혹은 완의(完議)라 한다. 논의가 일치되면 성상소(城上所)의 관원이 장관의 집에 가서 초안을 작성하였다(『광해군일기』 3년 4월 15일). 성상소의 관원은 왕에게 입계(入啓)를 하는 관원이다. 단, 장관의 부재 시에는 출사(出仕)를 기다리지 않고 논계(論啓)할 수 있었다.

삼사 논의의 공정성을 위해 사적인 이해관계의 개입은 부정되었다. 따라서 조그마한 혐의라도 있으면 이를 피하는 피혐이 관례였다. 피혐계가 제출되면 왕은 관원의 진퇴 여부를 바로 결정하지 않고 삼사의 처치(處置)를 기다린다. 처치란 관원의 피혐에 대해 잘잘못을 따져 왕에게 관원의 진퇴를 요구하는 것이다. 처치의 기준은 시비를 따라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왕이라도 처치를 번복하기가 어려웠다. 처치는 일차적으로 사헌부나 사간원 관원들에 의해서 이루어지며, 대간 내에서 처치가 어려우면 최종적으로 홍문관에서 처치하였다. 피혐을 삼사의 처치에 맡긴 것은 삼사 언론의 공정성을 확보하고 공론 정치를 표방하기 위해서였다.

변천

홍문관의 설치를 계기로 삼사의 언론 활동이 활발해졌다. 이런 속에서 삼사의 활동 범위가 확대되며 삼사의 정치적인 지위가 크게 향상되었다. 16세기 이래로 논의 구조의 기본적인 틀이 갖춰지고, 17세기 사림 정치 시기에 삼사의 언론 활동이 더욱 활성화되면서 삼사의 논의 구조는 관행으로 정착되었다. 이를 통해 대신과 재상들의 권력을 견제하면서 공론 정치를 활성화하는 데 기여하였다.

단, 17세기 붕당의 정치적 비중이 높아짐에 따라 삼사의 언론도 붕당의 이해관계에서 벗어나기 어려워졌다. 정국의 주도권을 어느 붕당이 잡느냐에 따라서 여론의 향배가 바뀌었다. 정국의 주도권을 잡은 붕당은 자기 붕당의 이익을 확보하고 상대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삼사의 언론을 활용했으며, 그렇지 않은 붕당은 주도권을 잡은 붕당의 문제점이나 비리를 탄핵하는 데 삼사의 언론을 활용하였다.

17세기 후반 이후 붕당 간의 경쟁이 격화되고, 이의 해결을 위해 탕평책이 실시되었다. 탕평책의 실시로 삼사의 언론 활동은 크게 위축되었다. 본격적인 탕평책이 실시된 영조대에는 전랑의 자천제 혁파와 한천제(翰薦制) 개혁 등 청요직(淸要職)에 대한 개편이 이루어졌다. 이런 가운데 삼사의 언론은 공론이 아닌 당론(黨論)으로 규정되기까지 하면서 이들의 언론 활동이 공정하지 못하다는 지적이 자주 제기되었다. 그리하여 이전 시기 대간이 활동하는 관행 가운데 하나인 풍문탄핵에 대해 그 근거를 조사하라는 명령이 자주 내려졌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삼사의 위상은 크게 위축되어, 대간의 선발이 재상들의 생색내는 자리라는 표현이나(『영조실록』 11년 11월 23일) 대간의 논계를 대신들이 검토하는 등(『영조실록』 20년 10월 11일) 언론 활동 역시 대신이나 재상에게 견제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참고문헌

  •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사(28): 조선 중기 사림 세력의 등장과 활동』, 국사편찬위원회, 1995.
  •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사(30):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국사편찬위원회,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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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우기, 「전랑과 삼사의 관계에서 본 16세기 권력 구조」, 『역사교육논집』13·14,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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