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골제(碧骨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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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김제에 위치한 수리시설.

개설

벽골제는 백제시대부터 활용된 수리시설이다. 백제와 통일신라시대, 그리고 고려시대 이래로 여러 번 수축을 거듭하였다. 조선초기 태종대에 대대적인 수축으로 논농사에 활용되었으나 세종대에 제방이 무너진 이후에 더 이상 수축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조선후기에 간혹 벽골제를 수축해야 한다는 건의는 있었으나 노동력 동원에 대한 부담으로 끝내 수축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내용 및 특징

벽골제는 한국의 농업사에서 벼농사의 보급과 발전, 수리시설의 축조 등을 설명할 때마다 반드시 언급되는 중요한 유적 중 하나이다. 벽골제는 백제 비류왕 27년인 330년에 현재의 위치에 축조된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저수지로 알려져 있다. 벽골제의 규모가 워낙 크다 보니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 두 책에서 모두 벽골제 축조에 대한 내용을 찾을 수 있다. 이후 통일신라시대가 되면 원성왕대에 신라 조정에서 인근 지역의 주민들을 동원하여 벽골제를 증축(增築)했다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벽골제와 관련된 기록들은 고려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다만 벽골제가 어떻게 증축되고 보수, 관리되었는지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없다. 다만 조선초기의 기록에서 고려시대 현종 연간과 1143년(고려 인종 21)에 벽골제가 보수되었다는 사실을 찾아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벽골제를 벽골지(碧骨池)라고 기록하고 있다. 지(池)는 저수지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벽골제의 규모와 수혜 면적에 대해 『삼국사기』에는 제방의 길이가 1,800보라고 하였는데 이는 현존하는 벽골제 제방의 길이와 큰 차이가 없다. 따라서 벽골제가 처음 축조 당시부터 현재의 위치에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한편 『삼국유사』에서는 벽골제의 수혜 면적을 논 14,070결이라고 서술하였다.

조선초기 태종대에는 대대적으로 벽골제를 보수하고 증축하였다. 당시 벽골제를 증축한 이후에 주변에 개간이 가능한 토지가 무려 6,000여 결에 이르렀다고 한다. 또한 세종대에 비바람으로 벽골제가 무너져 제방 아래에 있던 약 2,000여 결의 토지가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이러한 기록들을 보면 벽골제의 규모가 매우 컸으며 벽골제를 이용하여 농사를 짓는 토지가 상당히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변천

조선초기 태종대에 대대적인 보수와 증축이 이루어졌다. 1408년(태종 8) 전라도병마도절제사(全羅道兵馬都節制使)강사덕(姜思德)이 마땅히 해야 할 조목을 몇 가지 올렸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벽골제의 수축이었다. 그는 벽골제의 옛 제언(堤堰) 터가 아직은 튼실하므로, 이 터를 바탕으로 벽골제를 수축한다면 많은 토지가 혜택을 입을 수 있다고 보았다(『태종실록』 8년 9월 17일). 하지만 수축 명령이 내려진 것은 1415년(태종 15)이었다. 당시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박습(朴習)의 건의에 따라서 벽골제의 수축 공사가 시작되었다(『태종실록』 15년 8월 1일). 박습은 성곽이 방어를 잘하고 외적의 침입을 막는 반면 제방은 물을 저장하고 관개를 통하는 데 있다고 하면서 가뭄을 극복하기 위한 가장 좋은 대안이라고 제시했다. 그는 벽골제를 수축할 곳을 직접 답사한 뒤 길이가 7천여 척, 너비는 50척이고 수문(水門)이 모두 4곳에 있다고 하면서 제방 아래 경작 가능한 토지를 다량 확보할 수 있다고 보았다. 결국 태종의 명을 받아 그해 10월 20일부터 벽골제 수축이 시작되었다. 전라도관찰사박습은 축언사목(築堤事目)을 만들어 조정에 올리고 수문의 개축을 위해 석공(石工)을 파견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개간지는 대략 6,000여 결이었다. 이 토지를 비옥도에 따라 중전(中田)으로 계산하게 될 경우 1,800만 평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크기였다.

하지만 경작 가능한 토지가 늘어난다고 해도 농토의 질을 높이기 위해 묵히는 땅인 진지(陳地)가 발생하기 마련이었다. 결국 이 문제는 중앙조정 차원에서 처리해야 할 문제였다.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 바로 둔전(屯田)이었다. 1417년(태종 17) 우사간(右司諫)최순(崔洵)은 상소를 올려 제언으로 침수된 토지를 소유자에게 분급하지 말고 둔전을 설치하자고 제안했다. 전조(田租)를 수취하는 것보다 몇 배 이익이 되었기 때문이다.

세종대에 이르자 벽골제의 석주(石柱)만 나란히 서 있을 뿐 둑이 무너져버렸다. 1420년(세종 2) 제언 아래 2,000여 결이 피해를 입었다. 결국 다시 벽골제를 보수해야 한다는 논의가 이루어졌으나 풍년이 오기를 기다려 수축하는 것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이후 실제로 수축이 되었는지는 『조선왕조실록』에서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이득이 적고 폐단이 많아 무너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더 이상 수축이 진행되지 않은 이유로는 첫째 제언 내부의 경작지를 불법적으로 이용하여 수리 기능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둘째 수령이 제대로 제언의 수축과 관리를 수행하지 않았던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셋째 제언의 수축에 동원하는 노동력이 제대로 제공되지 못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넷째 조정의 수리정책이 문종대 이후가 되면 제언에서 보(洑)로 전환되었다는 점이다.

결국 벽골제는 17세기 이후 제방이 무너진 채로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많은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17세기의 실학자인 반계유형원은 『반계수록(磻溪隨錄)』에서 호남의 벽골제는 커다란 저수지인데 여러 군현에 혜택을 주었지만 지금은 모두 무너지고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며 호강한 세력가들이 차지하게 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즉 벽골제는 세종대 무너진 이후 17세기까지 오랫동안 무너진 그대로 방치되어 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유형원은 벽골제가 모두 무너진 것은 아니기 때문에 1천 명을 10일 동안만 동원한다면 다시 수축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현종대에는 전라도관찰사가 벽골제를 수축하자고 건의하였으나 실제로 시행에 이르지는 않았다. 전라도관찰사를 지낸 적이 있는 허적(許積)은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벽골제는 수축하는 것이 손해는 적고 이익은 많지만 거대한 공역이 투입되어야 하는 공사이기 때문에 다시 논의해볼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비변사에서는 벽골제 수축이 가볍지 않다고 하면서 반대 입장을 보였다. 결국 조선후기에는 벽골제가 잠재적으로 논농사에 이용할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은 확인할 수 있지만 무너진 제방을 다시 수축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일제시대에 이르면 이 지역에 수많은 일본인 경영의 농장이 개설되었고 이들이 주도가 되어 동진수리조합이 결성되었다. 이 조합이 1925년 제방을 관개용 기간수로(基幹水路)로 개조하여 이용함에 따라 벽골제의 원형이 크게 손상되고 말았다. 이후 1975년 수문지 2곳에 대한 발굴조사로 인해 실제 원형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1. 그림1_00017242_『동여도』 -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삼국유사(三國遺事)』
  • 『반계수록(磻溪隨錄)』
  • 염정섭, 「조선초기의 수리정책과 김제 벽골제」, 『농업사연구』6-2, 한국농업사학회, 2007.
  • 윤무병, 「김제 벽골제 발굴보고」, 『백제연구』7,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1976.
  • 장호, 「벽골제와 그 주변의 지형 및 지리적 변천에 대한 고찰」, 『문화역사지리』20-1, 한국문화역사지리학회, 2008.
  • 허수열, 『일제초기 조선의 농업』, 한길사, 2011.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