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촌(民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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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민으로 구성된 마을.

개설

민촌은 양반들이 사는 반촌(班村)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상민(常民) 또는 평민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마을이었다. 일반적으로 백정·무녀·장인(匠人)·역졸 등 특수 신분층이 거주하는 마을은 민촌에서 제외하고 특수촌으로 분류하였다.

민촌의 등장은 양반 중심의 신분제와 농업 중심의 경제 구조가 낳은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민촌의 상민들은 자신들의 동질성을 토대로 생활 공동체를 조직하여 상부상조와 공동 노동을 도모하고 유대를 강화해 나갔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전통 사회는 신분제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거주지 또한 신분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민촌은 신라나 고려 때에도 존재하였을 것이지만, 순수한 의미의 민촌은 조선시대의 사회구조와 깊은 관련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신분과 직업에 따라 집단 촌락이 형성되었다. 대개 지배층인 양반이 거주하는 반촌이 있고, 그 아래에 피지배층이 거주하는 민촌이 있었다. 한편 민촌 이외에 하층민들이 집단 거주하는 원촌(院村), 교촌(校村), 역촌(驛村), 사촌(寺村), 포촌(浦村)(『숙종실록』 38년 4월 22일), 점촌(店村)(『정조실록』 11년 9월 29일) 등도 있었으며, 이들은 효율적 생산 활동과 사회적 분업을 꾀하였다.

조직 및 담당 직무

민촌이란 광역의 행정촌이 아니라 개개의 자연촌을 말하였다. 여기에 거주하는 상민들의 대부분은 양반이 소유하는 토지를 경작하는 소작농이었으나, 자작농 또는 자소작농도 있었다. 그들 간에 경제적 차등은 있을 수 있으나, 신분은 대등했기 때문에 그들 나름의 동류의식이 존재하였다. 그에 따라 민촌은 근린 관계로 맺어지는 것이 보통이어서 향도계(香徒契) 또는 촌계(村契)라고 부르는 자치 조직을 두었다. 이들 조직은 상부상조와 공동 노동을 도모하는 역할을 지녔다. 한편 민촌은 반촌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양반이 주도하는 동계(洞契)의 일원이기도 하였다.

변천

민촌은 뚜렷한 성씨 집단 없이 여러 성씨가 혼재하는 각성 촌락(各姓村落)이 많은 것이 특징이었다. 평민은 양반에 비하여 문중(門中) 조직이 빈약하기 때문에 결속력이 상대적으로 약하였다. 그러나 종법(宗法) 질서의 확산에 따라 조선후기로 갈수록 민촌에서도 반촌에서와 같이 동성 촌락(同姓村落)을 이루는 경향이 강화되기도 하였다. 한편 신분제의 동요에 따라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양반이 크게 증가하였다. 그에 따라 민촌이 줄어들고 상민과 양반이 함께 거주하는 민촌이 늘어났다.

참고문헌

  • 고승제, 『한국 촌락사회사 연구』, 일지사, 1977.
  • 이해준, 『조선시기 촌락사회사』, 민족문화사, 1996.
  • 정진영, 『조선시대 향촌사회사』, 한길사, 1998.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한국의 사회와 문화 2: 전통적 생활양식 연구(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