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하부(門下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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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와 조선 초 백관의 업무를 관장하며 봉박(封駁)과 간쟁(諫諍) 등을 관장하던 관서.

개설

고려 후기인 1369년(고려 공민왕 18)에 설치되어 조정 내 백관의 업무를 관장하는 한편 예하의 낭사는 봉박과 간쟁의 업무를 관장하였다. 조선 초기 문하부의 기능은 의정부에 통합되면서 폐지되었고, 낭사는 사간원이 설치되면서 혁파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려 후기인 1369년(고려 공민왕 18)에 설치된 관서로, 종전의 중서문하성·첨의부·도첨의사사·도첨의부 등을 계승하여 설치되었다. 고려 후기 문하부는 조선 건국 직후인 1392년(태조 1) 문무관제 반포 때에 그대로 계승되어 설치되었으며, 소속 2품 이상의 재신(宰臣)은 도평의사사에 합좌(合坐)하였다.

조직 및 담당 직무

고려 후기 설치 당시 문하부는 영문하·문하좌·우시중·문하찬성사·문하평리·정당문학·지문하부사와 좌·우산기상시 및 직문하·사의대부·문하사인과 좌·우헌납, 문하녹사, 문하주서 등의 직제를 가졌다. 이후 우왕 때 영문하를 판문하로 개정하였다.

조선 건국 직후에는 재신 그룹에 정1품의 영부사 1명, 좌시중 1명, 우시중 1명과 종1품의 시랑찬성사 2명, 정2품의 참찬부사 4명, 지부사 1명, 정당문학 1명, 상의부사 2명을 두었다. 그리고 예하의 낭사에는 정3품의 좌산기상시 1명, 우산기상시 1명, 종3품의 좌간의대부 1명, 우간의대부 1명과 직문하 1명, 정4품의 내사사인 1명, 정5품의 기거주 1명, 좌보궐 1명, 우보궐 1명, 정6품의 좌습유 1명, 우습유 1명, 정7품의 주서 1명, 도사 1명 등으로 구성하였다.

문하부는 설치 이후 중추원·삼사(三司)와 함께 도평의사사에 합좌하며 국가의 중요한 정책 결정 과정 등에 참여하였다. 1392년 설치 당시 직무는 재신의 경우 국가의 모든 서무(庶務)를 관장하고, 낭사는 헌납(獻納)·간쟁(諫諍)·박정(駁正)·차제(差除)·교지(敎旨)의 수발(受發)과 계(啓)·전(牋)의 소통과 진달(進達) 등의 일을 관장하도록 규정하였다.

이에 따라 상언(上言)이나 상서(上書)를 통해서 승하한 현비(顯妃)의 시호 제정 문제에 관여하였고(『태조실록』 5년 8월 28일), 시정의 득실과 민생 문제를 진술하였으며(『태조실록』 7년 5월 16일), 사관의 경연 입시 문제(『정종실록』 1년 1월 7일)와 환관에 대한 봉작의 철폐(『정종실록』 1년 2월 1일), 국왕의 거둥 시 의장과 시위 문제(『정종실록』 1년 4월 16일)를 거론하였다.

또한 1399년(정종 1) 5월 1일에는 태상왕에 대한 국왕의 문안 및 시위 문제와 검교의 직책과 부녀자에 대한 녹 지급의 혁파 등 10여 개조의 시무에 대한 상소를 올리기도 하는 등(『정종실록』 1년 5월 1일) 국정 전반에 관여하였다. 낭사의 경우는 가을철 농사일과 군사 훈련을 위한 축성 중지를 건의하는 등(『태조실록』 5년 7월 6일)의 업무 이외에도 비리 관원들에 대한 탄핵이나 간쟁 등을 담당하였다.

변천

1400년 4월 의정부가 설치되면서 문하부는 삼사와 함께 참여하였다. 그러나 의정부의 역할이 강화되면서 서로 업무가 충돌하게 되어 결국 1401년(태종 1) 7월 혁파되어 의정부에 통합되며 의정부에 대한 행정 일원화가 이루어졌다. 낭사의 경우는 같은 시기에 사간원으로 개편되었다.

참고문헌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