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피에르(拉別耳)"의 두 판 사이의 차이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3번째 줄: 3번째 줄:
 
{{인물|대표표제=라피에르|한글표제=라피에르|한자표제=拉別耳|대역어=라피에르(La Pierre, Lapierre)|상위어=|하위어=|동의어=|관련어=기해사옥(己亥邪獄), 병오사옥(丙午邪獄), 세실 제독([瑟西耳] 提督)|분야=정치/외교/외교사안|유형=인물|지역=프랑스/중국/대한민국|시대=청/조선|왕대=청/조선|집필자=한승훈|이칭=|성별=남자|생년=|몰년=|본관=|출신지=프랑스|관력=프랑스 해군 대령, 중국파견함대 분함대장|가족관계=|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6912|실록연계=}}
 
{{인물|대표표제=라피에르|한글표제=라피에르|한자표제=拉別耳|대역어=라피에르(La Pierre, Lapierre)|상위어=|하위어=|동의어=|관련어=기해사옥(己亥邪獄), 병오사옥(丙午邪獄), 세실 제독([瑟西耳] 提督)|분야=정치/외교/외교사안|유형=인물|지역=프랑스/중국/대한민국|시대=청/조선|왕대=청/조선|집필자=한승훈|이칭=|성별=남자|생년=|몰년=|본관=|출신지=프랑스|관력=프랑스 해군 대령, 중국파견함대 분함대장|가족관계=|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6912|실록연계=}}
  
La Pierre 또는 Lapierre(?~?). 프랑스 중국파견함대 분함대장(分艦隊長), 해군대령. 중국명 납별이(拉別耳). 프랑스에서 출생. 1846년 세실(Cecile) 제독이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를 포함한 3명의 프랑스 선교사 학살에 대해 조선정부에 항의서한을 전달한 후, 이에 대한 회신을 받고자 1847년 7월 2척의 군함에 메스트로(Maistre, 李) 신부와 최양업(崔良業) 부제를 태우고 중국을 출발하였다. 그러나 조선 근해에 이르러 전라도 고군산도(古群山島)에서 배가 좌초되어 조선정부의 회답을 받지 못하고 종교의 자유를 청하는 서한을 전라도 관찰사에게 전한 후 구조하러 온 영국(英國)배로 중국으로 돌아갔다. 조선정부는 그 후 세실의 편지에 회신을 보냈는데 이 회신은 마카오에 있는 라피에르에게 전달되었다고 한다. (인용 출처: [http://dictionary.catholic.or.kr/dictionary.asp?name1=%B6%F3%C7%C7%BF%A1%B8%A3
+
La Pierre 또는 Lapierre(?~?). 프랑스 중국파견함대 분함대장(分艦隊長), 해군대령. 중국명 납별이(拉別耳). 프랑스에서 출생. 1846년 세실(Cecile) 제독이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를 포함한 3명의 프랑스 선교사 학살에 대해 조선정부에 항의서한을 전달한 후, 이에 대한 회신을 받고자 1847년 7월 2척의 군함에 메스트로(Maistre, 李) 신부와 최양업(崔良業) 부제를 태우고 중국을 출발하였다. 그러나 조선 근해에 이르러 전라도 고군산도(古群山島)에서 배가 좌초되어 조선정부의 회답을 받지 못하고 종교의 자유를 청하는 서한을 전라도 관찰사에게 전한 후 구조하러 온 영국(英國)배로 중국으로 돌아갔다. 조선정부는 그 후 세실의 편지에 회신을 보냈는데 이 회신은 마카오에 있는 라피에르에게 전달되었다고 한다. (인용 출처: [http://dictionary.catholic.or.kr/dictionary.asp?name1=%B6%F3%C7%C7%BF%A1%B8%A3 '라피에르', 『가톨릭 사전』])
'라피에르', 『가톨릭 사전』 http://dictionary.catholic.or.kr])
 
  
 
=='''참고문헌'''==
 
=='''참고문헌'''==

2020년 8월 14일 (금) 12:21 판




La Pierre 또는 Lapierre(?~?). 프랑스 중국파견함대 분함대장(分艦隊長), 해군대령. 중국명 납별이(拉別耳). 프랑스에서 출생. 1846년 세실(Cecile) 제독이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를 포함한 3명의 프랑스 선교사 학살에 대해 조선정부에 항의서한을 전달한 후, 이에 대한 회신을 받고자 1847년 7월 2척의 군함에 메스트로(Maistre, 李) 신부와 최양업(崔良業) 부제를 태우고 중국을 출발하였다. 그러나 조선 근해에 이르러 전라도 고군산도(古群山島)에서 배가 좌초되어 조선정부의 회답을 받지 못하고 종교의 자유를 청하는 서한을 전라도 관찰사에게 전한 후 구조하러 온 영국(英國)배로 중국으로 돌아갔다. 조선정부는 그 후 세실의 편지에 회신을 보냈는데 이 회신은 마카오에 있는 라피에르에게 전달되었다고 한다. (인용 출처: '라피에르', 『가톨릭 사전』)

참고문헌

  • 『敎會史硏究, 1』, 한국교회사연구소, 19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