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명(大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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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세기 말~19세기 말 일본에서 넓은 영지와 강력한 권력을 가졌던 유력자들.

개설

대명(大名, [다이묘])은 ‘크다’는 뜻의 대(大, [다이])와 ‘소유자의 이름을 붙인 사유지’라는 뜻의 명(名, [묘])이 합해져 이루어진 말이었다. 대명은 초기에는 무사 계급의 우두머리로 출발하였으나 점차 그 권한이 확대되어 지역 내 군사권 및 사법권·행정권·경제권을 가지게 되었다. 강호(江戶, [에도])시대에는 장군(將軍, [쇼군]) 아래로 편입되었으나 자신의 성(城)에서 가신들을 거느린 영주로 군림하였다. 19세기 메이지유신으로 일본에 근대화가 시작되면서 영지의 통치권을 박탈당하였다.

내용 및 특징

대명은 원래 명전(名田, [묘덴])을 많이 소유한 자에 대한 호칭이었으나, 겸창(鎌倉, [가마쿠라])시대에 들어와서는 유력한 무사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11세기와 12세기에 국토가 다양한 사유지로 분할되고 율령 체제가 급속히 무너지면서 지방 치안을 위한 무사 계급의 중요성이 증대되었다. 이들이 사유지에 대하여 행정상의 지배권을 행사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무사의 우두머리들을 대명이라고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실정(室町, [무로마치])시대에 와서는 각 지방의 수호(守護, [슈고])와 장원(莊園, [쇼엔])에서의 지주 등도 대명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수호대명(守護大名, [슈고 다이묘])은 실정막부(室町幕府, [무로마치 바쿠후])의 관할 지역에서 경비와 치안 유지를 담당하였는데, 토지를 사유하지는 못한 채 대부분 귀족이나 종교 단체 소유의 경작지에서 거두어들이는 세금을 통하여 수입을 얻었다.

15세기 후반에 이르러 실정막부의 권위가 상실되면서 수호대명 대신 전국대명(戰國大名, [센고쿠 다이묘])이 등장하였다. 수호대명은 막부의 권력이 쇠퇴함에 따라 그 지위가 매우 약화되었다. 이에 수호대(守護代, [슈고다이]) 또는 재지 호족들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세력들이 수호대명을 무너뜨리고 군웅(群雄) 할거의 시대를 이끌었는데, 이러한 군웅들을 전국대명이라 한 것이었다.

이들은 수호대명과 달리 장원 체제를 부정하고 토지와 백성을 일원적으로 지배하는 분국(分國)을 만들고, 무사들을 토지에서 분리시켜 가신단을 조직하여 강력히 통제하였다. 또한 민정에 주력하고 사업을 활발히 하여 풍부한 경제력을 갖추기 위하여 힘썼는데, 그 목적은 이를 통하여 군사 활동에 필요한 재원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16세기에 전국대명들은 영토의 통합과 세력의 확대를 위하여 끊임없이 전쟁을 치렀다. 이들은 저마다 전국 통일을 목표로 교토로 진출하려 하였다. 전국대명의 하나인 직전신장(織田信長, [오다 노부나가])은 기동성이 뛰어난 족경(足輕, [아시가루])을 주체로 하는 군사력을 조직해서 오와리와 미노를 장악한 뒤 기후를 근거지로 천하 통일에 착수하였다. 그 뒤를 이어 풍신수길(豊臣秀吉,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직전신장(織田信長)의 후계자로서 지위를 굳혔으나, 1603년 덕천가강(德川家康, [도쿠가와 이에야스])이 일본을 통일하면서 덕천막부(徳川幕府, [도쿠가와 바쿠후])가 성립되었다.

덕천막부시대(1603~1867년)에는 대명의 범위가 확정되어, 일반적으로 1만석(10,000석) 이상을 생산하는 영지를 보유한 무사를 일컬었다. 대명은 장군에게서 영지 소유권과 그에 대한 통치권을 부여받았는데, 그 영지의 규모는 다양하여 최고 1,000,000여 석에서부터 10,000석까지 격차가 컸다. 대명들은 영지의 소유 규모에 따라 행정, 군사 기구를 구성하였으며, 그 통치 조직과 영토를 아울러 보통 번(藩)이라고 하였다.

또한 대명들은 영지 규모에 따라 막부로부터 군역을 부과받아 병마(兵馬)와 무기를 상비해야 하였으며, 성의 수축과 하천 토목공사 등 공역(公役)에도 동원되었다. 그리고 막부의 정치를 담당하는 대로(大老, [다이로]), 노중(老中, [로주]), 약년기(若年寄, [와카도시요리]) 등은 대명의 직책이 되었다. 대명은 1603년 막부 성립 당시 185명 정도였으나, 중기 이후 안정기에는 260~270명까지 이르렀다.

대명들은 장군과의 관계에 따라 친번(親藩, [신판]), 보대(譜代, [후다이]), 외양(外樣, [도자마])으로 분류되었다. 친번은 덕천(徳川) 일가로 그중에서도 미장(尾張, [오와리]), 기이(紀伊), 수호(水戶, [미토])는 어삼가(御三家, [고산케])라 하여 중시되었다. 보대(譜代)는 세키가하라 전투 이전부터 덕천(徳川)씨의 전통적 가신(家臣)이 대명으로 된 것으로, 막부의 신임이 두터워 대로·노중 등의 중직(重職)에 임명되었다. 도자마는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에 덕천씨에 복종한 대명인데, 영지의 규모는 일반적으로 큰 데 비하여 실제로는 요직에 임명되지 않았으며 시코쿠·규슈 등의 변경 지역에 배치되었다.

덕천막부시대의 대명은 자신의 영지 안에서는 상당한 자유를 누리며 군림하였다. 대명들은 막부의 법령을 기준으로 하여 영민(領民)들을 다스리지만, 그에 어긋나지만 않는다면 독자적인 정치를 행하는 것도 가능하였기 때문이다.

대명은 가신단(家臣團)을 이용하여 자신의 영지를 다스렸다. 막부의 직제를 축소하여 가로(家老), 성대(城代, [죠다이]), 측용인(側用人, [소바요닌]) 등의 직책을 두었는데, 우두머리인 가로들로 이루어진 중신회의에서 정책에 책임을 졌고 다른 관리들을 감독하였다. 대명은 가신단의 경력에 따라 영지를 나누어 주었으며, 이들을 대명의 성 가까이 거주하게 하면서 통제해 나갔다. 그러나 대명은 자신에게 권력을 집중시켜야 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에, 점차 가신에게 영지를 주는 제도를 폐지하고 쌀이나 화폐를 지급하는 봉록제(俸祿制)로 개정해 나갔다.

한편 덕천막부는 1615년 무사가 지켜야 하는 의무를 정한 법령인 무가법(武家法)을 공포해서 대명 통제를 강화하였다. 무가법은 장군과 대명의 관계를 법적인 상하 관계로 확정하면서, 문무(文武)의 장려, 유락(遊樂)의 금지, 범죄자 은닉 금지, 모반인이나 살해인의 추방, 성곽(城郭)의 무단 수리나 신축 금지 등 13개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막부는 대명들에게 이 규정을 준수할 것을 엄격히 요구하는 한편, 만약 규정을 어기면 처벌하여 막부의 권위를 보이고자 하였다.

게다가 1635년 3대 장군덕천가광(德川家光, [도쿠가와 이에미쓰])는 무가법을 확대 정비하면서 참근교대(參勤交代, [산킨코타이])를 제도화하였다. 참근교대는 대명이 정기적으로 자신의 영지와 강호(江戶: 현 도쿄)의 장군 직할지에서 번갈아 살도록 하는 제도였다. 이는 원래 덕천가강이 정권을 장악한 뒤 대명 중에서 충성의 표시로 에도에 저택을 짓고 인질을 남겨 둔 것에서 시작된 제도였다. 그 뒤로 1년은 에도에서 거주하고 1년은 자기 영지에서 거주하되, 자신이 영지에 거주할 경우에는 처자식이 인질로 에도에 상주해야만 하였다. 그 외에도 형벌로 관직이나 신분을 거두어들이는 개역(改易, [가이에키]), 영지를 이동시키는 전봉(轉封, [덴포]) 등도 대명을 통제하는 유효한 수단이 되었다.

1867년 왕정(王政) 복고로 막부가 폐지되면서 수립된 신정부는 1868년 구 막부 세력을 타도하고, 1869년 판적봉환(版籍奉還)을 실시하였다. 이에 대명들은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던 토지와 인민을 천황에게 반환하고 지번사(知藩事)라는 지방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들은 신정부로부터 월급인 가록(家祿)을 받았지만, 세습을 인정받고 신분상으로는 화족(華族)으로 규정되었다. 여전히 자신의 가신단을 이끌고 각 지역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1871년의 폐번치현(廢藩置縣)을 통하여 신정부가 중앙집권적 통일국가를 실현함으로써 대명의 영지는 완전히 폐지되었고, 대명들은 도쿄에 거주하면서 연금을 받으며 사는 귀족으로 편입되었다.

참고문헌

  • 아사오 나오히로 외, 『새로 쓴 일본사』, 창비, 2003.
  • 笠原一男, 『詳說 日本史硏究』, 山川出版社,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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