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다량의홍(多多良義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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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실정시대 전기의 영주.

개설

다다량(多多良)은 대내씨(大內氏)의 본성으로 대내씨는 백제 성왕의 왕자인 임성태자(琳聖太子)를 시조로 하였다. 실정(室町)시대 대내씨는 주방(周防)을 본거로 하는 서일본의 대표적인 영주가 되었다. 대내씨는 조선과의 통교시 ‘대내다다량(大內多多良)’을 명의로 사용하였다. 따라서 조선 문헌에 등장하는 다다량의홍(多多良義弘)과 대내다다량의홍은 대내의홍(大內義弘)을 말하였다.

의홍은 대내홍세(大內弘世)의 아들로 1356년 태어났다. 아명은 손태랑(孫太郎), 관위는 처음 주방개(周防介), 후에는 좌경권대부(左京權大夫)가 되었다. 1371년 11세의 나이로 부친 홍세와 함께 구주탐제(九州探題) 금천료준(今川了俊)를 따라 구주로 건너가 각지에서 싸웠다. 1372년 구주의 정치적 중심지인 대재부(大宰府) 공략 후 홍세와 함께 본거로 돌아왔다. 1374년 실정막부로부터 료준을 구원하라는 명령이 내려왔지만 홍세가 이를 거부하였다. 이에 대하여 의홍은 부친의 뜻과는 달리 1375년 스스로 출진해 구주로 건너나 1377년에는 남조 측의 대표적인 무장인 국지무조(菊池武朝)를 대파하는 등 구주를 공략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1380년 홍세가 사망하기 전년부터 대내씨에 내분이 생겨 동생 만홍(滿弘)과 대내씨의 가독계승을 다투는 내전에 빠졌다. 의홍은 막부의 지지를 얻고 승리하였고, 1381년 6월 만홍과 화해가 성립되어 의홍이 주방(周防)·장문(長門)·풍전(豊前)의 수호직을 유지하고 만홍은 석견(石見)의 수호가 되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이로써 의홍의 가독으로서의 지위가 확립되었다.

1389년 장군족리의만(足利義滿)이 엄도(嚴島)를 참배할 때 수행하고 의만이 상경할 때도 동행하였는데 이후 경도에 머무는 날이 많아졌다. 1391년 산명씨청(山名氏淸) 등이 의만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켰는데 의홍은 용전을 펼쳐 산명씨 토벌에 큰 전공을 세웠다. 이때의 일을 명덕(明德)의 난이라고도 하였다. 이 공으로 산명씨의 영지였던 화천(和泉)·기이(紀伊)의 수호직이 주어져 대내씨는 6주의 수호직을 가지게 되었다.

한편 의홍은 1395년 조선에 사신을 파견한 후 왜구단속과 왜구에 의한 피로인을 송환하는 등 조선과 우호 관계를 맺으며 무역상 유리한 조건을 형성하였다. 특히 자신들이 백제왕자의 후손임을 내세워 조선 내의 토지를 요청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이러한 대내씨의 부강함은 장군의만에게는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1397년 의만은 구주의 소이정뢰(少貳貞賴)의 토벌을 의홍에게 명해, 의홍은 동생인 만홍·성견(盛見)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만홍이 전사하는 등 대내씨는 크게 고전하였다. 이에 1398년 의홍이 직접 출진해 소이씨를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그 후 장군의만은 의홍에게 경도로 돌아올 것을 명하였는데 의홍은 이에 불복하였다. 의만의 명령은 수차례 반복되었는데 이는 의홍에 대한 일종의 도발이기도 하였다. 1399년결국 의홍은 막부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켰지만 곧 막부군에 의하여 진압되었고 의홍도 계(堺)에서 전사하였다.

활동 사항

대내씨가 조선에 파견한 사신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395년(태조 4)의 것이었다(『태조실록』 4년 12월 16일). 이때는 ‘대내다다량’이라고만 해서 의홍의 이름이 보이지 않지만 당시 대내씨의 가독이 의홍이었고 이후에는 계속 다다량의홍의 명의로 사신을 보내고 있으므로 1395년의 사신도 의홍이 보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고려사』 「하을지전」에 의하면 의홍은 1379년 이미 고려와도 왜구 문제로 교섭한 적이 있었다. 다만 이후 1395년까지는 의홍의 통교 기록이 없는데, 이것은 구주탐제 금천료준이 조선과의 통교를 자신이 일임하고자 대내씨 등의 영주들이 조선과 직접 통교하는 것을 규제한 것과 관계가 있었다. 1395년 8월 료준이 구주탐제에서 파면당한 직후 의홍이 사신을 파견해 온 것은 단순한 우연이라 할 수 없었다. 의홍 및 그 이후 대내씨와 조선과의 통교는 구주 지역의 정세변화와도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에 주의할 필요가 있었다. 참고로 조선과의 통교시 의홍은 일본에서의 관위인 ‘좌경권대부(左京權大夫)’나 6개국 수호를 뜻하는 ‘6주목(六州牧)’ 등을 칭하였다.

의홍은 조선과 통교하며 많은 경제적 이익을 얻었다. 이것은 대내씨가 부강해진 원천 중 하나였다. 특기할 만한 것은 1399년(정종 1) 자신이 백제왕의 후손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조선 내에 토지를 하사할 것을 요청하였던 일이다(『정종실록』 1년 7월 10일). 이때 의홍은 구주에서 소이씨를 물리친 공적을 말하고 있었다. 이 무렵 막부와의 관계가 악화되고 있던 상황에서 의홍이 조선에 토지를 요청한 일은 당시의 정세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참고문헌

  • 國史大辭典編集委員会, 『國史大辭典』, 吉川弘文館, 1999.
  • 松岡久人, 『大內氏の硏究』, 清文堂出版, 2011.
  • 須田牧子, 『中世日朝關係と大内氏』, 東京大學出版會, 2011.
  • 藤井 崇, 『室町期大名権力論』, 同成社, 2013.
  • 松岡久人, 『大内義弘』(中世武士選書), 戎光祥出版, 2013.
  • 須田牧子, 「15세기 일본의 朝鮮佛具 수입과 그 의의: 大內氏의 大藏經 수입을 중심으로」, 『한일관계사연구』 20, 한일관계사학회,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