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례(吉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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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례(五禮)의 하나로 상례(喪禮)와 장례(葬禮) 등의 흉례(凶禮)를 제외한 모든 제사 의식.

개설

『주례(周禮)』「대종백(大宗伯)」에 “길례로써 나라의 귀신을 제사하고, 흉례로써 나라의 상사(喪事)를 슬퍼하고, 빈례(賓禮)로써 다른 나라들과 친하고, 군례(軍禮)로써 나라들을 화동(和同)하며, 가례(嘉禮)로써 만백성을 친한다.”라고 했는데, 제사는 대상에 따라 명칭을 달리하였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서 천신(天神)에게 지내는 제사를 사(祀), 지기(地祇)에게 지내는 제사를 제(祭), 인귀(人鬼)에게 지내는 제사를 향(享), 문선왕(文宣王)공자(孔子)에게 지내는 제사를 석전(釋奠)이라 하였다.

공가(公家)의 길례, 즉 왕가 혹은 국가적인 의미의 길례에 대한 규정과 내용은 『세종실록』 「오례」, 『국조오례의』,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 『대한예전(大韓禮典)』, 『춘관통고(春官通考)』, 『대전회통(大典會通)』 등 법전류와 『종묘의궤(宗廟儀軌)』, 『사직서의궤(社稷署儀軌)』등 의궤류에 자세히 나온다.

길례는 크게 대사(大祀)·중사(中祀)·소사(小祀)로 구분된다. 대사는 희생으로 소·양·돼지를 바치는 대뢰(大牢)로 지내는 것이다. 소사는 양만을 쓰는 소뢰(小牢)로 지내는 것이다. 『고려사(高麗史)』「예지(禮志)」에는 대사로 원구(圓丘)·방택(方澤)·사직(社稷)·태묘(太廟)·별묘(別廟)·제릉(諸陵)·경령전(景靈殿)을 들었다. 그러나 『국조오례의』에 오면 원구·방택·경령전은 제외되고 별묘나 제릉은 중사나 소사가 된다.

『국조오례의서례(國朝五禮儀序例)』에는 대사로 사직·종묘(宗廟)·영녕전(永寧殿)이 있다. 중사에는 풍운뇌우(風雲雷雨)·악해독(嶽海瀆)·선농(先農)·선잠(先蠶)·우사(雩祀)·문선왕·역대 시조가 있고, 소사에는 영성(靈星)·노인성(老人星)·마조(馬祖)·명산대천·사한(司寒)·선목(先牧)·마사(馬社)·마보(馬步)·마제(禡祭)·영제(禜祭)·포제(酺祭)·칠사(七祀)·둑제[纛祭]·여제(厲祭)가 있다. 사직·종묘·풍운뇌우·악해독·명산대천·우사에 지내는 기우제는 모두 소사이다. 속제(俗祭)로 지내는 문소전(文昭殿)·진전(眞殿)·의묘(懿廟)·산릉(山陵)은 모두 소사이고, 주현(州縣)의 사직·문선왕·포제·여제·영제도 모두 소사이다.

1705년(숙종 31) 대보단(大報壇)이 생겨 대사로 된다. 대보단은 임진왜란 때 원군을 보낸 명나라 신종(神宗)의 은혜를 기리기 위해 창덕궁 금원(禁苑) 옆에 설치하였다(『숙종실록』30년 12월 21일). 처음에는 신종의 위패만 존치하여 제사지냈으나, 영조 때에 명나라 태조와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까지 합사(合祀)하였다.

대한제국이 되면서 환구단(圜丘壇)이 생겨 대사로 된다. 경모궁(景慕宮)·관왕묘(關王廟)와 역대 군왕이 중사가 된다. 경모궁은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를 모신 곳이다. 1776년(정조 즉위) 8월에 경모궁이라 하고 정조가 현판 글씨를 썼다. 관왕묘는 관우(關羽)를 신앙하기 위하여 건립된 묘당(廟堂)으로 관성묘(關聖廟)라고도 한다. 중국에서는 명나라 초부터 관왕묘를 건립하여 일반 서민에까지도 그 신앙이 전파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에 명나라 군사들에 의해 관왕묘가 건립되고, 숙종 때에 관왕묘 참배 의절이 만들어졌다.

공자를 모시는 문묘(文廟) 이외에 공자·안자(顔子)·증자(曾子)·자사(子思)·맹자(孟子)의 아버지를 모시는 계성사(啓聖祠), 관학 학생으로 절의가 있었던 4현을 모시는 사현사(四賢祠), 단종에게 충신이 되었던 사람들을 모시는 영월의 장릉(莊陵) 배식단(配食壇) 등이 소사에 첨가된다. 그리고 여제·둑제 이외에 성황(城隍)이 소사로 첨가된다.

내용 및 특징

1) 사직

사직(社稷)은 종묘와 함께 국가의 상징으로, 사(祀)는 토지신을, 직(稷)은 곡신(穀神)을 의미한다. 농업을 기본으로 하던 조선시대에 토지와 곡식의 중요성은 다른 것에 우선시되었다. 따라서 사직에 대한 제사도 우선적으로 강조되었다. 사직에 대한 의식과 관련해서 『국조오례의』에서는 춘추급납제사직의(春秋及臘祭社稷儀), 춘추급납제사직섭사의(春秋及臘祭社稷攝事儀), 기고사직의(祈告社稷儀), 주현춘추사직의(州縣春秋社稷儀), 주현기고사직의(州縣祈告社稷儀) 등이 수록되어 있다.

조선후기에는 풍년을 비는 기곡사직의(祈穀社稷儀)가 대사로 첨가되었다. 이는 황제가 지내는 것이라 논란이 많았으나 백성을 위한다는 의미로 지냈다. 영조대에는 기곡사직섭사의도 소사에서 대사로 승격되었다.

이밖에도 광의의 사직제로 볼 수 있는 여러 제사 의식이 마련되었다. 특정한 산이나 강에 대한 의식으로 제삼각산의(祭三角山儀), 제목멱의(祭木覓儀), 제한강의(祭漢江儀), 제주현명산대천의(祭州縣名山大川儀) 등을 비롯해 신농씨(神農氏)에게 드리는 제사인 향선농의(享先農儀), 양잠과 관련된 향선잠의(享先蠶儀), 풍우의 순조로움을 비는 사풍운뇌우의(祀風雲雷雨儀), 우사의(雩祀儀) 등의 의식이 마련되었다.

2) 종묘

사직과 함께 길례 중 중요한 것이 종묘에 대한 제사이다. 역대 왕과 왕후, 추존 왕과 왕비 등의 신위를 모신 종묘에 드리는 제사는 대사의 하나이다.

종묘에 드리는 제사는 체(禘)·협(祫)이라 하여, 천자는 5년에 한 번 체제(禘祭)를, 제후는 3년에 한 번 협제(祫祭)를 지냈다. 『국조오례의』에는 종묘에 드리는 제사와 관련해서, 사시급납향종묘의(四時及臘享宗廟儀), 친향기고종묘의(親享祈告宗廟儀), 사시급납향종묘섭사의(四時及臘享宗廟攝事儀), 속절급삭망향종묘의(俗節及朔望享宗廟儀), 천신종묘의(薦新宗廟儀) 등이 규정되었다.

그런데 1421년(세종 3) 목조를 조천(祧遷)하면서 영녕전(永寧殿)을 세우고 매년 봄가을로 제사 지내게 되니, 3년에 한 번 조천한 조상을 모두 모시고 지내는 협제를 지낼 필요가 없어졌다. 그래서 고려시대에는 없던 춘추향영녕전의(春秋享永寧殿儀)가 『세종실록』 「오례」에 처음 생겨 『국조오례의』에서 정식 제사가 되었다.

조선후기 숙종대에는 묘현의(廟見儀)라 하여 가례를 올린 후에 왕비와 왕세자빈이 종묘와 영녕전을 배알하는 의식이 행해졌다. 원래 여자는 종묘에 출입할 수 없었는데 묘현의를 시행하느라 숙종 비 인현왕후(仁顯王后)와 당시 세자빈이 처음 종묘에 알현하였다. 이에 따라 왕세자·왕세제·왕세손, 그리고 왕세자빈·왕세제빈·왕세손빈이 종묘와 영녕전에 배알하는 의식이 생기고, 『국조속오례의』에는 왕비알종묘영녕전의(王妃謁宗廟永寧殿儀)와 왕세자빈알종묘영녕전의(王世子嬪謁宗廟永寧殿儀)가 추가되었다.

조선전기에는 문소전이라는 원묘(原廟)를 만들어 국왕의 가묘(家廟) 같은 형태로 태조와 직계 4대를 제사지냈다. 이외에 연은전(延恩殿)이라 하여 성종 아버지 덕종을 모시고 제사 지내는 사당이 있었다. 그러나 이는 이중묘라는 혐의가 있어 중종대부터 폐지가 주장되다가 임진왜란 때 불탄 후 폐지되었다. 『국조오례의』에 문소전에 제사를 지내는 의식인 사시급속절향문소전의(四時及俗節享文昭殿儀)·삭망문소전의(朔望文昭殿儀)·친향의묘의(親享懿廟儀) 등이 있다.

3) 능침

길례에는 이 밖에도 국왕과 왕후의 능침에 제사 혹은 참배의식인 친향제릉의(親享諸陵儀), 기신친향제릉의(忌晨親享諸陵儀), 사시급속절삭망향제릉의(四時及俗節朔望享諸陵儀), 배릉의(拜陵儀) 또는 행릉의(幸陵儀)와 왕세자가 능침을 참배하는 의식인 왕세자배릉의(王世子拜陵儀) 등이 있다. 또한 공자 및 유학에서 사표가 되는 인물들의 위패를 모신 문묘에 대한 제사 의식인 춘추석전문선왕의(春秋釋奠文宣王儀), 문선왕삭망전의(文宣王朔望奠儀) 등이 있다.

4) 묘

조선후기 숙종대에 계성사와 사현사가 생겨 제사가 행해졌다. 계성사는 중국의 5성(聖)의 아버지를 모시기 위하여 지은 사당으로 공자의 아버지 제국공(齊國公) 공숙량흘(孔叔梁紇), 안자의 아버지 곡부후(曲阜侯) 안무유(顔無繇), 증자의 아버지 내무후(萊蕪侯) 증점(曾點), 자사의 아버지 사수후(泗水侯) 공리(孔鯉), 맹자의 아버지 주국공(邾國公) 맹격(孟激)이다.

사현사는 중국 진(晉)나라의 태학생 동양(董養), 당나라의 태학생 하번(何蕃), 송나라의 태학생 진동(陳東)·구양철(歐陽澈)을 모시는 사당이다. 이는 학행일치를 추구하는 심학화(心學化)된 조선 성리학을 공부하는 태학생들에게 학행일치를 실천했던 태학생들을 모델로 제시하는 사당이었다.

변천

조선시대 길례는 조선전기에는 주자성리학으로, 조선후기에는 조선성리학으로 체계화시키면서 변천하여 갔다. 종묘에서는 영녕전, 정전이 되는 태묘와 왕실 가묘 같은 원묘인 문소전으로 되었다. 조선후기에는 문소전은 이중묘라 하여 없어지고 종묘를 왕실 가묘로 정립하였다. 이는 혼례 후에 왕비나 세자빈이 종묘에서 묘현례를 하는 것으로 정립되었다.

사직에서는 조선전기에는 사직 대제를 정립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조선후기에는 사직 기곡제가 중요한 대사로 정립되는 것으로 변천해 갔다. 이와 더불어 대보단이 설치되어 조선 중화 의식을 대표하는 대사로 정립되었다. 이는 문묘에서 계성사, 사현사 등이 행해지면서 학행일치를 추구하는 조선후기 조선성리학의 의례를 반영하고 있었다.

의의

조선시대 길례는 제사의 형태로 공동체를 형성하고 운영하는 의례였다. 국가에서는 종묘와 사직에 지내는 제사로 국가 공동체를, 학교에서는 문묘·향교·서원 등에 지내는 제사로 학문 공동체를, 지역에서는 산천·성황에 지내는 제사로, 집안에서는 문중·집안의 제사로 친족 공동체를 형성하고 운영하였다. 이러한 의례는 조선전기에는 주자성리학으로, 조선후기에는 조선성리학으로 체계화시키면서 시대에 알맞게 정립하여 갔다.

참고문헌

  • 『대전회통(大典會通)』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
  • 『대한예전(大韓禮典)』
  • 『춘관통고(春官通考)』
  • 『문헌비고(文獻備考)』
  • 국립민속박물관, 『한국의 제사』, 국립민속박물관, 2003.
  • 『한국역사용어시소러스』, 국사편찬위원회, http://thesaurus.histor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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